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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사간원정언, 이천현감, 파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할아버지는 참판 박정(朴炡)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박세당(朴世堂)이며, 어머니는 현령(縣令) 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중부(仲父)인 세후(世垕)에게 입양되었다.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으로서 1677년 알성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다. 이 때 시관(試官)으로 출제를 잘못했다는 남인들의 탄핵을 받아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80년에 홍문관의 부수찬(副修撰) · 수찬 · 부교리(副校理) ·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문묘 승출(陞黜: 위패를 새로이 모시거나 있던 위패를 출향시킴)에 관한 문제와 당시 이조판서 이단하(李端夏)를 질책한 소를 올려 파직되었다.그 뒤 서인들이 여러 차례 박태보의 환수를 청해 1682년 홍문관의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일정 기간 휴가를 주던 제도)에 선발되었다. 사가독서를 마친 후 이천현감(伊川縣監)을 시작으로 부수찬 · 교리 · 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했으며, 호남 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당시 서인 중에서 송시열(宋時烈)과 윤선거(尹宣擧)가 서로 정적으로 있을 때, 윤선거의 외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친족 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시비를 가려 통쾌하게 논조를 전개한 적도 있다.이어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파주목사로 나갔을 때, 조정에서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어버렸다. 그런데 박태보가 부임해 재직하는 파주에서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이를 존속시켜나가 인책, 면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해 주동적으로 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재주가 뛰어나 젊은 나이에 장원 급제를 한 경력이 있으며, 학문 태도도 깊고 높아 당대의 명망 있는 선비들과도 깊은 교유를 맺었다. 특히 교유한 친우는 주로 서인의 소론파들로 최석정(崔錫鼎) · 조지겸(趙持謙) · 임영(林泳) · 오도일(吳道一) · 한태동(韓泰東) 등이 있다.타고난 성품도 뛰어나 지기(志氣)가 고상하고 견식이 투철해 여러 차례의 상소에서 보여준 것처럼 시비를 가리는 데는 조리가 정연하고 조금이라도 비리를 보면 과감히 나섰으며 의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서슴지 않았다.죽은 뒤 왕은 곧 후회했고,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을 세웠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풍계사(豐溪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정재집(定齋集)』 14권, 편서로는 『주서국편(周書國編)』, 글씨로는 박임종비(朴林宗碑) · 예조참판박규표비(禮曹參判朴葵表碑) · 박상충비(朴尙衷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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