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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1층34-1

**성철(性徹, 1912년 4월 6일 (음력 2월 19일) ~ 1993년 11월 4일)은 대한민국의 승려이다. 속명(俗名)은 이영주(李英柱)이고 아호는 퇴옹(退翁)이다. 대한민국의 선종을 대표할 정도로 전형(典型)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승려이다.[1] 1912년 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산청 출생이며, 1993년 11월 4일 합천 해인사 퇴설당에서 입적하였다.

서기 1912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태어났다. 1936년 해인사(海印寺)에서 동산(東山) 대종사(大宗師)에게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38년 운봉(雲峰)을 계사(戒師)로 보살계(菩薩戒) · 비구계(比丘戒)를 받았고 봉암사(鳳巖寺)에서 청담(靑潭)과 함께 수행하면서 불타(佛陀)답게 살자고 결사(結社)하는 등 새로운 선풍(禪風)을 고양(高揚)시켰다. 1967년 해인총림(海印叢林) 초대 방장(方丈)이 되었고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宗正)에 취임하였다. 세속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별장 조경터를 본인이 마음들어 하여 세워진 해운대 해월정사에서 장좌불와의 휴유증으로 요양하며 말년을 보낸다.[2] 1993년 11월 4일 세수 81세로 열반에 들었다.[1] 성철스님은 제자들의 부축을 받아 앉은 상태에서 친딸인 불필스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았으며 60년대초 통합종단출범 이후 처음인 7일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3] 한편, 출가하기 전에 혼인해서 다섯 살 터울의 딸이 두 명 있었으나[4] 큰딸(이도경)은 14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 딸이 태어나기 직전인 1936년 출가를 하여 스님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둘째 딸(불필 스님)의 이름은 본인(성철 스님)의 아버지가 '수경'이라 지어줬고[5] 아버지(이상언)는 유학자 집안의 장남인 본인(성철 스님)이 출가하자 "집안 망했다"라 난리를 치기도 했으며[6] 세상을 떠나기 직전 "이놈들아 나는 성철 스님에게 간다!!"라고 고함을 지른 뒤 숨을 거두었으며[7]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타계한 어머니(강상봉)는 죽기 전에 정식 출가는 안 했지만 머리를 깎고 장삼을 착용하며 생활하면서 "다시 태어나면 스님에 되겠다"고 말하며 여생을 마쳤고 본인(성철 스님)의 아내[8] 이덕명 여사는 남편과 외동딸(불필 스님)이 모두 출가한 뒤 시부모님도 세상을 떠난 후 딸 불필 스님의 은사인 인홍 스님의 권유로 출가하여 '일휴'란 법명을 받은 뒤 비구니로 삶을 마감하기도 했다.교리를 대상으로 한 성철의 견해는 저서인 《선문정로》(1981)에 잘 노정되어 있다.[1] 대한민국 선불교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지눌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반대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했다.[1] 그 후 현재까지 대한민국 불교 철학계의 돈 · 점 논쟁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1] 성철은 지행합일(知行合一) 단계의 지(知)만이 진정한 지(知)이고 지눌 돈오점수는 실제(實際)이고 세부까지 포함한 현실을 좇지 않는 직접 지각하거나 체험할 수 없는 관념과 표상(表象)에 경도(傾倒)되어 실증성이 희박(稀薄)하게 조직된 이론에 근거한 지(知)일 뿐 참 지(知)가 아니라고 주장(主張)하였다.[1] 그러나 지눌과 성철은 가르침의 대상이 달랐으므로 시비(是非)를 가리기가 어렵다.[1] 지눌은 일반인에게 불교 교의를 풀어서 밝혔고 성철은 수행하는 승려에게 설법하였다.[1]하지만, 향곡혜림(香谷慧林)과 서옹상순(西翁尚純)은 돈오돈수론자들이였다. 도림법전(道林法典)과 혜암성관(慧庵性觀) 또한 철저한 돈오돈수론자들이였다. 그리고 진제법원(真際法遠) 스님 또한 '돈오돈수는 오종(五宗) 가풍의 법칙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문광스님 著, 탄허학, 조계종출판사 출판, 제 4장의 현대 한국 선사상의 두 지평 p.186~p.189참고 바람.)돈점논쟁은 관법(觀法)과 간화선 사이에서, 혹은 교종과 선종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 이것을 그렇게 이해했다면, 그것은 이 논쟁의 본질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돈오돈수론 주장은 선종에 속한 스님들이 제대로 선종을 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다.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것이 교종이나 관법을 무시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효스님 같은 분은 교학자였지만 현대 한국의 선사들 중 그 누구도 원효를 지해종도(知解宗徒)라고 부르지 않는다. 원효스님은 교(教)의 길을 철저하고 뛰어나게 걸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성철스님의 돈오돈수론 주장도 선(禪)의 길을 본분사대로 걸어갔던 것 뿐인 것이다.

  • “내가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았다가 나중에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하여 깨*침에 들어서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았다. 지금 휴식처를 얻고 나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으냐? 다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다고 인정하겠노라.”

중에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고측(古則)을 성철이 원용(援用)하여 인상(印象)을 남기면서 일반인에게도 유명해졌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화두(話頭)는 최초에 미망(迷妄)하는 단계는 수도(修道)하기 이전 평범한 일상계(日常界)이나 수도를 이용해 득도(得道)하면 체험하는 평범한 일상을 완벽히 초월한 세계는 일상에서 하는 착각(錯覺)이 적멸(寂滅)한 상태이나 진정하게 득도하려면 거기서 진일보(進一步)해 평범한 세계로 회귀하여야 한다. 화광동진을 이용해 다시 돌아온 그 세계는 외양상으로는 최초처럼 속(俗)되고 평범한 단계와 같으나 내면상으로는 처음과는 차원이 판이(判異)하다. 이는 나선형(螺旋形) 성격을 띤 회귀를 뜻한다. 이로 보아 임제(臨濟)의 후예(後裔)인 선사(禪師) 유신(惟信)이 설법한 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공안(公案)은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 사상을 그대로 해설한 교시(敎示)이다. 재언하면, 수도자(修道者)가 작고 대수롭지 않게 득도(得道)했을 때는 물이 산으로, 산은 물인 듯 혼란(混亂)스럽지만, 득도하는 규모가 확대되면 물은 물로, 산은 산으로 보게 된다. 외부 세계나 자연을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관망(觀望)하는 태도를 획득한다는 뜻이다.1936년 24세에 출가한 성철스님(1912년-1993)은 승납 3년만인 1940년 28세 때,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하안거 중 문득 대오했다. 그러나 75대 경허조사(1849-1912)를 76대 만공조사(1871-1946)가 이었다고 하던 시절이어서, 정혜사의 만공스님을 찾아갔는데, 너무나 쉽게 깨달음을 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을 하여 인가를 신청하지 않았다. 이후에 76대 만공조사를 77대 전강조사(1898-1975)가 이었다고 했는데, 전강조사에게도 인가를 신청하지 않았다.불교에서는 다른 깨달은 선지식으로부터의 인가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아도, 당대 조사스님의 인가는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당시 불교 관행이, 별로 큰 깨달음도 아닌데 쉽게 인가를 해주는 관행이었다고 하더라도, 조사의 인가는 반드시 받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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