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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천기대요(新校天機大要)1책완질(대정12년(19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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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12년(1923년)에 박문서관에서 간행된 신교천기대요(新校天機大要)1책완질 상태좋으며 파장없음 크기:22*15.5센치 **이서구(李書九)선생의 시가 첫면에 적혀있음 **이서구(李書九) 1754(영조 30)∼1825(순조 25). 조선 후기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척08齋)·강산(薑山)·소완정(素玩亭)·석모산인(席帽山人). 아버지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정부영의정을 증직받은 원(遠)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을 증직받은 평산신씨(平山申氏)로 부사 사관(思觀)의 딸이다. 1758년(영조 34)그의 나이 5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계비(繼#비17)는 진주이씨(晋州李氏)로 한복(漢復)의 딸이며 역시 정경부인이 되었다. 그는 외할머니에게서 자랐으며, 외숙으로부터 당시(唐詩)·《사기》·《통감 通鑑》 등을 배웠다. 외가에서 7년을 지내고 12세가 되던 1765년 아버지에게 돌아와 여러 경전(經典)을 읽기 시작하였다. 16세부터 박지원(朴趾源)을 만나 문장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770년에는 귀양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잃었다.이때까지 그는 일정한 스승이 없이 시문과 금석(金石)·육서(六書) 등을 읽다가, 21세 되던 1774년 가을에 정시(庭試)병과에 제16인으로 뽑혔고, 10월에 섭기주(攝記注)로 첫 벼슬을 받았다.22세 때인 1775년부터 5, 6년간은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두고, 특히 사서를 탐독하였다.1785년에 시강원사서, 1786년에 홍문관교리를 거쳐 한성부판윤·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판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하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문자학(文字學)과 전고(典故)에 조예가 깊고 글씨에 뛰어났다. 사가시인 중에서는 유일한 적출이었고, 벼슬도 순탄하게 올라갔다. 그러나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외로움이 일생동안 영향을 미쳤고, 벼슬보다는 은거(隱居)에 미련을 가졌으며, 아들이 없음과 늙어감과 벼슬을 한 일, 이 세가지를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그는 한번도 연행(燕行)길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홍대용(洪大容)과 박지원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 실학파 문사들과 사귀며 학문과 문학을 연마하고 시국을 논하였으므로, 자연히 독창과 개성, 현실문제, 조선의 역사와 자연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문학을 하게 되었다. 22세 때에 이덕무 등과 함께 《한객건연집 韓客巾衍集》에 참가함으로써 사가시인 또는 실학사대가(實學四大家)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의 시는 그의 개인적 성향관계로 혁신적이거나 현실에만 치우치기보다 온유돈후하고 사색적이며, 사물을 관조하는 자세로 담백하게, 고묘(高妙)한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많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자연세계와 고귀한 내면의 깊이를 아울러 그려냄으로써 시의 격조를 높이는 데 힘썼다.문집으로 《척재집》과 《강산초집 薑山初集》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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