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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明齋)윤증(尹拯) 간찰1장 요약정보 및 구매

명재(明齋)윤증(尹拯) 간찰1장(1698년(戊寅年十月十二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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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사 또는 연대 1698년(戊寅年十月十二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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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明齋)윤증(尹拯) 간찰1장(1698년(戊寅年十月十二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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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8년(戊寅年十月十二日)에 대학자이신 명재(明齋)윤증(尹拯) 간찰1장 상태아주좋음 크기:40*29센치 **1698년에 선생께서 쓰신 간찰임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자인(子仁)이다. 그리고 호는 명재(明齋) ·유봉(酉峯)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조부는 팔송 황(煌)이고, 우계 성혼(成渾)의 사위였다. 아버지 미촌 선거(宣擧)는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일찍이 송시열(宋時烈) ·윤휴(尹) ·박세채(朴世采) 등 당대의 명유들과 함께 교유하였다.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 장백(長白)의 딸이다. 그는 부사(父師)를 시작으로 유계(兪棨)와 송준길(宋浚吉), 송시열의 3대 사문(師門)에 들어가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는 당대의 정통유학을 수학하면서 박세당(朴世堂) ·박세채 ·민이승(閔以升) 등과 교유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특히 송시열의 문하에서는 많은 문인들 중 유독 뛰어나 고제(高弟)로 지목되었고, 서인계 정통으로서는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체득하였다. 비록 등과(登科)는 하지 않았지만, 학행이 사림 간에 뛰어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발탁을 시작으로 공조좌랑 ·세자시강원진강(世子侍講院進講) ·대사헌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의 임명을 받았으나, 이는 그의 학문적 ·정치적 위치를 반영할 뿐 일체 사양하고 실직에 나아간 일이 없다. 그러나 그의 정견은 정치적 중요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로 피력하였고, 또는 정치당국자나 학인과의 왕복서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러한 그의 정치적 성행이 노소분당과 그를 이은 당쟁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노론의 일방적인 정국 전횡을 견제하였다.그의 사상적 배경은 16세기 이래로 변화해온 조선사회 이해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송시열과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그것은 밖으로는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숭명의리(송시열)와 대청실리외교문제(윤증)의 대립이었고, 양난 이후의 사회변동과 경제적 곤란은 주자학적 의리론과 명분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역사적 명제를 제기시켰다. 그는 많은 문제(門弟) 중에서도 특히 정제두(鄭齊斗)와 각별한 관계를 가졌다. 두 사람 사이의 학문 사상적 교류는 《명재유고(明齋遺稿)》와 《하곡집(霞谷集)》의 왕복서한에서 실증되고 있다. 그것은 송시열의 주자학적 조화론과 의리론만으로는 변모하는 정국을 바로잡을 정치철학으로 미흡하다는 것이었고, 왕학적(王學的) 학문과 실학적(實學的) 경륜을 담은 정치철학이 내재되어 있었다. 또한, 그가 스승인 송시열에게 보낸 신유의서(辛酉擬書)에 의하면 스승을 의리쌍행(義利雙行)이라 비판하여 배사론으로 지목받았고, 송시열의 주자학적 종본주의와 이에 근거한 존화대의(尊華大義) 및 숭명벌청(崇明伐淸)의 북벌론을 정면으로 반박, 회니시비(懷尼是非)의 발단을 이루었다. 그의 아버지인 윤선거 비문 찬술 시비와 더불어 신유의서의 작성으로 노소당인 간의 격렬하게 전개된 회니시비는 송시열과 윤선거 부자가 모두 죽은 후에도 더욱 격렬하여 노소당인들이 대립되었던 17세기를 넘기면서도 끝을 맺지 못하고 경종 ·영조 ·정조 대에 해당되는 18세기 노소당론으로 넘겨졌다. 그는 어진 스승을 배반했다는 패륜으로 지목받았지만, 그를 따르던 소론 진보세력들에 의해 그의 사상이 꾸준히 전승 발전되어 노론일당 전제체제 하에서 비판 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즉, 1680년(숙종 6)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 등이 경연에 나오도록 청하고, 박세채(朴世采)·조지겸(趙持謙) 등이 거듭 출사를 권했으나 사양했다. 그는 송시열·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민정중의 세도가 바뀌어야 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풀어져야만 출사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일로 최신(崔愼)이 송시열의 죄없음을 변명한다는 핑계로 윤증의 사서(私書)를 공개하면서 그가 스승을 배반했다고 했으며, 또 김수항·민정중 등도 윤증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했다. 한편 윤증이 아버지가 죽었을 때 윤휴(尹)의 조문을 받았는데 이 사실을 안 송시열은 불쾌하게 여겼으며, 또 숙종초에 송시열 일파가 남인에게 화를 입었을 때 윤증이 남인과의 인연관계로 화를 면한 일로 해서 더욱 송시열의 의심을 받았다. 또한 아버지의 묘갈명(墓碣名)을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내용중에 야유하는 뜻을 적자 이의 시정을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로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반목(反目)을 \'회니(懷泥)의 반목\' 또는 \'회니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송시열은 회덕(懷德)에, 윤증은 이산(泥山)에 산 연유로 그렇게 불렸다. 이처럼 송시열이 윤선거의 묘갈명을 탐탁하지 않은 자세로 지은 이유는 윤선거의 과거 행적과 주자학에 대한 사상적 태도를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를 수비하다가 성이 함락될 때 탈출하여 살아남았던 윤선거에 대해 대의명분을 저버렸다고 비판했다. 또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한 윤휴(尹)에 대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윤선거를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윤선거는 죽기 직전 송시열의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편향과 편협한 정국 운영을 비판하는 〈기유의서 己酉擬書〉를 남겼다. 송시열과 윤선거 간의 이러한 감정 대립은 윤선거의 사후 묘갈명 작성을 계기로 해서 윤증과 송시열의 감정대립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서인이 강·온 양파로 분리될 때 그를 지지하는 사류(士類)들에 의해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그는 송시열을 \"대인의 의와 소인의 이익을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같이 쓴다\"(義利雙行王覇竝用)고 비난했으며,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어 아버지의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젊어서 불문에 들었던 일을 끌어서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선현을 모독했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가 전부 자신에게 있다고 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윤증을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사림과 간관(諫官) 사이에 비난과 변명의 상소가 계속되었다. 노론·소론 간의 당쟁은 계속되었고, 그가 죽은 뒤 1715년 유계가 지은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에 정호(鄭澔)가 그를 비난한 것을 계기로 당쟁이 격화, 소론 일파가 거세되고 아버지와 함께 관작이 추탈되었다. 1722년(경종 2) 소론 유생 김수구(金壽龜)·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하여 복관되었다. 홍주의 용계서원, 노성의 노강서원, 영광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저서에는 《명재유고》·《명재의례문답 (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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