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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4 2책 낙권임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학자이자 문신.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문신 중 한 사람이다. 학문과 사환을 병행하여 뚜렷한 성공을 거둔 이상적인 학자 관료이다.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취송(鷲松)·나고(懶高)·호우(毫宇)·만귀산인(晩歸山人). 초명은 이영조(李永祚)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사도 세자에게 절의를 지켜 북비공(北扉公)으로 이름난 돈재(遯齋) 이석문(李碩文)이고, 할아버지는 이민겸(李敏謙)이다. 아버지는 이형진(李亨鎭)이고, 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박난경(朴鸞慶)의 딸이다. 정언 이규진(李奎鎭)에게 입양되었다. 부인은 풍양 조씨로 조응수(趙應洙)의 딸이다. 아들은 이정상(李鼎相)이다.이원조(李源祚)[1792~1871]는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 마을에서 태어났다. 1809년(순조 9) 문과에 급제하였다. 1813년(순조 13) 22세 되던 해에 상주에 있는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를 찾아가 정종로의 문인이 되었다. 승정원 가주서(承政院假注書)를 시작으로 여러 청요직(淸要職)과 승정원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1826년(순조 26) 결성현감(結城縣監), 1840년(헌종 6) 강릉부사(江陵府使), 1841년(헌종 7) 제주목사(濟州牧使), 1846년(헌종 12) 자산부사(慈山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850년(철종 1) 경주부윤 재직 중 암행어사의 탄핵을 당해서 삭직되었다가 후에 다시 등용되어 1854년(철종 5) 대사간·공조판서·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837년(헌종 3) 정언으로 있으면서 사치를 금하고 뇌물을 없애는 등 강력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임금을 상대로 경연에서 100회 이상 강의하였다. 또 친조카 한주(寒州) 이진상(李震相)[1818~1886]에게 큰 영향을 미쳐서 이진상이 조선 성리학의 대미를 장식하는 큰 학자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를 쓴 현상윤은 이진상을 조선 6대 성리학자로 꼽았다. 이진상은 이원조를 극진히 존경하여 이원조가 가는 곳은 늘 수행하였고, 강회가 있으면 자신이 강록을 정리하였다. 이원조는 파직되자 고향 성주로 돌아와 가야산 북쪽 기슭인 가천면 신계리의 포천곡류(布川曲流) 곁에 만귀정(晩歸亭)을 지어 저술(著述)에 전념하는 한편, 학계(學契)를 모아 교육에도 진력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75세의 늙은 몸으로 의병을 모집하는 등 나랏일에 전력하였다. 1871년(고종 8) 사망하였다.학자로서 많은 저술을 남기고 고위 관직을 역임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원조의 학문은 경학(經學)은 물론 사장학(詞章學), 사학(史學),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 걸쳐있는 것이 특징이다. 『응와문집(凝窩文集)』, 『응와속집(凝窩續集)』, 『응와잡록(凝窩雜錄)』, 『포천지(布川誌)』, 『무이도지(武夷圖誌)』, 『민보의(民堡議)』, 『탐라록(耽羅錄)』, 『당백전의(當百錢議)』, 『삼정의(三政議)』 등 많은 저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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