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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영덕 출신의 학자·문신.
이현일(李玄逸)[1627~1704]은 숙종 연간 퇴계학파를 이끌었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南人)의 산림(山林)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당쟁의 여파 속에 갑술환국 이후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낙인찍히며 정치적 고초를 당하였다.
이현일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升), 호는 갈암(葛庵)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은보(李殷輔)이며, 할아버지는 현감 이함(李涵),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 이시명(李時明)이다. 어머니는 안동장씨 장흥효(張興孝)의 딸 장계향(張桂香)이다. 부인은 무안박씨(務安朴氏) 박륵(朴玏)의 딸이다
이현일(李玄逸)은 1627년에 경상도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인량리(仁良里)에서 태어났다. 9세 때 「영화왕(詠花王)」이라는 시를 짓자 사람들이 이현일이 훗날 왕을 잘 보필할 것이라고 하였다. 아버지 이시명을 따라 가학을 익혔으며 형들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특히 중형(仲兄) 이휘일(李徽逸)을 따라 독서하였다. 20세 때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시제(試題)가 시휘(時諱)를 범하였다고 파방(罷榜)되었고, 22세 때 성시(省試)에서 떨어진 뒤로 과업을 그만두었다.효종이 승하한 뒤 조정에서 송시열(宋時烈)의 예설(禮說)을 채택하였다. 이에 1666년 영남 유림들이 상소를 준비하며 글짓기를 청하자 ‘복제소(服制疏)’를 지었다. 이때부터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로 떠올랐다. 1674년 숙종 즉위 후 남인이 집권하자 영릉참봉(寧陵參奉),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공조좌랑(工曹佐郎) 등에 제수되었으나 조정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1680년 남인이 실각한 뒤에는 학문에 침잠하였다.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영남남인을 대표하는 학자로 조정에 출사하였다. 성균관 사업을 시작으로 공조참의, 이조참의, 성균관좨주,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까지 올랐으며, 경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정치적 시련이 다가왔다. 당시 이현일은 이조판서로 있었는데, 4월에 조사기(趙嗣基)를 구원하였다는 이유로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7월에 1689년에 올린 상소가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모욕하였다는 혐의로 다시 서울로 와 국문을 받고 함경도 종성(鍾城)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 혐의로 인해 이현일은 노론 측에 의해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낙인찍혔다.
3년 뒤인 1697년에 고향과 좀 더 가까운 전라도 광양(光陽)으로 이배(移配)되었고, 74세 때인 1700년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이후 안동의 금소[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금수리]에 거처를 정하고 후학을 양성하다가 1704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