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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20.5*30센치
보내1층21상5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교(仲喬), 호는 진암(進菴)·하하재(下下齋).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8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증 사복시 정(贈司僕寺正) 정홍제(鄭弘濟)이며, 할아버지는 증 이조참의(贈吏曹參議) 정동박(鄭東璞)[1732~1792]이다. 아버지는 소소와(笑笑窩) 정흡(鄭熻)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 김희열(金煕說)의 딸이다. 부인은 광주 이씨(廣州李氏)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의 후손이자, 사인(士人) 이심운(李心運)의 딸이다.
정교(鄭墧)[1799~1879]는 1799년(정조 23)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1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가 있어, 4~5세 때 이미 예법(禮法)을 알았다. 그리하여 18세 때 부친상을 당하자, 거상(居喪)에 극진히 예를 행하였으므로, 조문객들이 모두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약관(弱冠)의 나이에는 이미 구경(九經)에 널리 통했으며, 글을 잘 짓는 것으로 이름을 떨쳤다. 다른 이들처럼 과거 응시를 위해 서울에 올라가기도 했지만, 선비의 풍속이 날로 변해 가는 것을 보고 고향 성주로 되돌아와 학문 연마에만 전념하였다.
이후 1868년(고종 5)에 관찰사(觀察使)가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익릉 참봉(翼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1875년(고종 12)에는 나라의 경사로 조정의 나이 많은 관리에게 관작을 더해 주면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品階)가 오르고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었다. 또한 1878년(고종 15)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品階)가 올랐으며,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호군(護軍)에 제수되었다.
정교는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학문을 권하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면서도 배운 것을 되풀이해서 익히되, 잡서(雜書)는 읽지 않고 오직 의리서(義理書)[성리학 서적]만을 반복해서 연구하였다. 과거 응시를 위해 상경(上京)했다가 성주로 되돌아온 뒤에는 선조의 책을 읽으며 학문에만 잠심하였는데, 특히 한강 정구가 저술한 『심경발휘(心經發揮)』를 보고 깨달은 바가 많았다.
죽기 전 병석에 있을 때에는 손자 정규영(鄭奎永)을 불러 율기(律己)[자기 자신을 다스림], 봉선(奉先)[선조의 덕업을 받듦], 응사(應事)[일에 응함]와 관련된 13조목의 가르침을 내렸다. 그 내용은 ‘화가 날 때는 나중에 생길 어려움을 생각하라[忿思難]’, ‘배움에 힘쓰며 게으르지 말라[勤學勿怠]’, ‘친척을 대할 때에는 온화하게 하라[處親戚怡]’, ‘제사는 반드시 정성껏 엄숙히 지내라[祭祀必精肅]’, ‘모든 일을 반드시 윗사람에게 물어보라[每事必問長者]’, ‘말을 적게 하라[罕言語]’, ‘공적인 일에 민첩하게 움직여라[敏於公]’, ‘남의 잘못을 드러내지 말라[不揚人之惡]’ 등이었다.
『성리휘찬(性理彙纂)』, 『상변찬요(常變纂要)』 등 성리학 및 예학과 관련된 저서를 저술했으며, 문집으로 『진암선생문집(進菴先生文集)』 8권 4책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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