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보통(앞4장 하단부에 일부 떨어지고 없음)
크기:19.5*29.5센치
보내1층21상4
**이우세[1751-1830]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학자.
본관은 경산(京山). 자(字)는 제겸(濟兼), 호는 석연(石淵). 정묘호란 때 성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천봉(李天封)이 6대조이고, 5대조는 이륜(李綸), 고조할아버지는 찰방 이형조(李亨祚), 증조할아버지는 이명신(李命新), 할아버지는 이규(李奎)이다. 아버지는 이성철(李性喆)이고,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 정영래(鄭榮來)의 딸이다.
이우세(李禹世)[1751~1830]는 1751년(영조 27)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암포촌(岩浦村)[현 안포 1리, 일명 덤개]에서 태어났고, 부(賦)와 책문(策文)에 뛰어났다. 1770년(영조 46) 부친상을 당하자 크게 슬퍼하여,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1782년(정조 6) 모친상을 당하여 상례의 예를 극진히 했고 날마다 묘소에 올라가 호곡(號哭)하였다.
1798년(정조 22) 생원시에 3등으로 합격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1801년(순조 1) 황간(黃澗) 관아에 머물고 있던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를 찾아 학문과 몸가짐에 대해 질문하였다. 이듬해에 스승에게서 ‘석연유거(石淵幽居)’라는 4자의 큰 글씨를 받아 왔고, 1804년에는 평소 지은 『향약증해(鄕約增解)』로 학문을 인정받았다.
이후 해마다 찾아가 가르침을 전수받았고, 김천 상원리로 성리학과 예학(禮學)에 밝은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를 찾아가 문답하였다. 창파(蒼坡) 정로(鄭魯), 팔물재(八勿齋) 이기보(李基普), 진암(進庵) 이수호(李遂浩), 치와(恥窩) 이민철(李敏哲) 등의 선비들과도 교유하였다. 성리학 관련 서적에서 손수 글귀를 뽑아 책상 위에 두고 밤낮으로 낭송했고, 책을 읽다가 핵심적인 부분에 이르면 수차례 소리 높여 읽었다. 평소 ‘계신근독(戒愼謹獨)’ 네 자를 써서 좌우명으로 삼았으며, 백인당(百忍堂)을 중수하고, 종안(宗案)[종중의 친목 도모를 위한 문서]을 수증(修增)하고 족보도 정리하였다. 필체가 강건하여 현판과 금석문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1830년(순조 30)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