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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56-소공(簫공) 이명우(李明雨) 달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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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소공(簫공) 이명우(李明雨) 달마도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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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소공(簫공) 이명우(李明雨) 달마도 요약정보 및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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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우 1923~2005

**달마도를 보면 그린 사람의 수행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 사이에는 선기가 남다른 이가 그린 달마도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는 믿음까지 생겼다. 소공(簫) 이명우(李明雨)는 달마도를 그리며 선을 쫓은 ‘화승(畵僧)’이었다. 소공거사가 그린 원만구족상을 갖춘 달마는 거사의 깊은 깨달음을 느끼게 한다. 선화계(禪畵界)의 거목으로 꼽히는 그는 달마를 그리고 화제(畵題)를 쓰며 삼매에 들었다. 그에게 있어 붓을 드는 것은 수행과 마찬가지였다.

전북 부안에 위치한 ‘전향원(篆香園)’. 소공거사의 집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 대문을 열면, 탁 트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제법 넓은 마당 곳곳에는 석불과 탑, 포대화상이 자리 잡고 있다. 향이 피어오르는 집, 전향원에서 소공거사는 날마다 다르마(Dharma. 법)를 깨달아 간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향을 피워 부처님께 올리는 것. 법당에서 한두 시간씩 참선을 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좌선이 끝나면 의례히 작업실로 향했다. 정성스레 먹을 갈 때, 그는 모든 정신을 손끝에 모았다. 먹을 흠뻑 적신 붓으로 한 획 내려 긋는 순간, 그는 선정에 들었다.
소공은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한학자였던 아버지는 그가 여섯 살 때부터 한학을 가르쳤다. 아버지 밑에서 사서(四書)까지 배우고, 뒤늦게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신교육을 받는 중에도 한학은 쉬지 않았다.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공부하면서 그의 학문은 깊이를 더해갔다.
한문 실력이 출중했던 그는 불교경전에까지 영역을 넓혀갔다. 유학과는 다른 부처님 가르침은 그에게 있어 새로운 세계였다. 점점 불교에 심취하게 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김제 금산사로 가 출가했다. 1939년의 일이다.
당시 금산사에는 대강백으로 잘 알려진 포광 김영수(1884~1967)박사가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소공 역시 불교전문강원에서 경전공부, 참선수행을 하며 사미시절을 보냈다. “포광스님이 달마도를 잘 그리셨습니다. 스님 밑에서 공부하면서 초조 보리달마에 매료됐어요. 보리달마는 선불교에 있어서 진리의 상징이고 대사를 그리는 것은 바로 진리를 표상화하는 작업이기 때문이죠. 어린 마음에 출가자가 달마 한 장은 그릴 줄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얕은 생각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침 김제 부용사에 당대에 내노라하는 금어(金魚)였던 김일섭(1900~1975, 중요무형문화재 48호 단청장)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일섭스님을 찾아간 소공은 “달마를 그리고 싶다”며 “보고 베낄 수 있게 한 장 그려줄 것”을 부탁했다. 간청을 해도 좀처럼 달마도를 주지 않는 스님 때문에 부용사를 자주 찾게 된 소공. 그 인연으로 일섭스님에게 사사를 받게 된다. 이 때부터 60년간 소공은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
1948년 강원 대교과를 졸업한 그는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등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소공은 전국의 제방선원에서 한암.동산.혜안.일타스님 등 밑에서 12안거를 성만했다. 어느 때, 정혜사에 주석하고 있던 만공스님(1871~1946)에게 ‘만법귀일 일귀하처’ 화두를 받아 참구했다. “상기가 돼 죽을 고비를 맞은 적도 있습니다. 구참스님들은 상기를 내리려면 화두를 놓아야한다는데 놓으려 해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4~5년을 흘려보내고 소공은 가야총림(현 해인총림) 효봉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에게 ‘무’자 화두를 받은 그는 화두를 챙기며 수행에 매진했다. “해제 이후 환희심이 난 수좌들과 함께 서옹스님을 입승으로 해인사 퇴설당에서 49일 용맹정진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21일 기도로 시작했는데, 대중이 모이니 수행에 힘이 붙었어요. 그래 49일로 기간을 늘였지요. 40일을 넘으니까 조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죽비로 경책하는 것으로 부족해 세워놓기까지 했으니까요. 그 때가 겨울이었는데, 저도 수마를 이기기 위해 눈으로 마사지를 하고 다시 좌정하는 것을 반복했습니다. 그 때 한 번도 경책을 안받은 분이 서옹스님이었어요.”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 수행하는 것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찰이 인민군 훈련장으로 변했습니다. 절에서는 주먹밥 몇 개 싸주며 ‘인연 따라 가라’고 하더군요.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속세로 돌아왔지만 그의 생활은 크게 변화지 않았다. 참선하고 달마 그리는 생활이 이어졌다. “달마를 제대로 그리고 화제까지 붙이려면 선을 공부해야 합니다. 선화는 지극히 정신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기법을 전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오로지 자기가 수행한 결과에 따른 것이지요.” 제대로 된 한 장의 달마도를 위해 수천, 수만 장의 달마도를 그렸다. “강한 채색의 불화보다도 선의 경지와 일맥상통하는 먹의 세계에 더 몰입해 달마대사를 형상화하게 됐습니다.” 소공은 개성적이고 독자적인 화풍을 이뤄갔다. 그의 선화가 갖는 깊이와 장중함을 먼저 알아본 사람들은 외국인이었다. 소공은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달마화 208태(態)전’을 필두로 대만 역사박물관에 초대 출품하는 등 많은 국제전에 초대됐다. 1999년에는 재일한국문화원 개원 20주년 기념 초대전에 참석하는 등 한국 선불교와 달마도를 세계에 알렸다.
불사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사찰에 그림을 내놓는 일도 많았다. 특히 소공은 전불불교 발전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전북지역은 예로부터 많은 고승대덕들이 머물며 수행한 곳. 부안에 암자를 짓고 공부하다가 깨달음을 얻은 부설거사를 비롯해 김제지역 불교의 중심인 진묵스님, 근대의 경허, 만공, 탄허, 혜안스님 등 많은 스님들이 이곳에서 수행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 소공. 그는 오랜 세월 백제불교의 전통을 이어온 전북지역이 정화운동을 지나오면서 전북불교가 낙후된 것을 늘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다 1988년 전북불교회를 탄생시키는데 일조했다. 전북불교회는 종파를 막론하고 전북권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불제자들의 모임, 소공은 회장을 맡아 전북불교회관 건립과 불교대학 운영 등에 힘을 보탰다. 특히 전북불교회관 건립기금 마련을 위해 20여점 이상의 작품을 보시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쉰 살 때는 달마도를 그리는데 동양 3국에서 나를 앞지를 자가 없다고 자부했었습니다. 그런데 칠십이 넘은 지금은 그렇지 못해요. 들어갈수록 더 어렵고, 해놓고 보면 서운해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남의 작품을 보면 단점이 잘 드러나는데, 내 작품을 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수행과 그림, 화제 모든 부분에서 단연 최고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던 소공이지만 늘 부족함을 느꼈다. 사찰에 있을 때나 집에 있을 때나, 신심을 견고히 하고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기 위해 다그치고 다그칠 뿐이었다. 짜여진 듯 엄격한 삶이었지만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보여준 넉넉한 품은 만나는 이로 하여금 포대화상을 떠올리게 했다.
소공은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올해 들어 건강이 갑자기 나빠져 병원과 집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작업을 쉬지 않았어요. 시력이 급격하게 저하됐는데도 말입니다. 병원에서도 선이나 불교에 대한 시나 게송이 떠오르면 받아 적게 하실 정도였습니다(아들 이송헌).” 선화에 대한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붓을 놓지 않았던 것. “먹으로 달마를 표현하는 것은 조사의 모습을 그려 예배의 대상으로 섬기기 위해서도 아니고, 후세에 그 특징 있는 외모를 전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알기 위해서일 뿐”이라는 그의 말처럼 소공은 붓으로 선(線)을 그리며 선(禪)을 체득해간 ‘재가(在家)의 화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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