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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4년초간 목판본 박광전(朴光前) 죽천선생문집(竹川先生文集)1책완질(1754년)

상품코드 139022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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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4년초간 목판본 박광전(朴光前) 죽천선생문집(竹川先生文集)1책완질(17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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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좋음 보21-3-2 **퇴도(退陶,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어진 문인(門人)이 호남에는 박광전 공이 있었는데, 자(字)는 현재(顯哉)이고 죽천(竹川)이 그 호이다. 그 조상은 진원현(珍原縣)에서 나왔고, 국초(國初)에 직제학(直提學) 박희중(朴熙中)이 있고, 그 아들 박휘(朴暉)가 보성(寶城)에서 박췌(朴贅)를 낳았는데 자손이 계속하여 살았다. 증조 박윤원(朴胤原)은 생원(生員)이고 할아버지 박간(朴衎)은 선교랑(宣敎郞)이고 아버지 박이의(朴而誼)는 진사(進士)이다. 공은 젊어서부터 문사(文辭)를 잘하였으므로 부형(父兄)이 과거 공부를 하라고 명하였으나, 뜻이 달라서 즐거워하지 않고 이따금 ≪성리전서(性理全書)≫를 취하여 깊이 생각하고 참뜻을 찾아서 기쁘게 스스로 얻은 것이 있었다. 기묘 사화(己卯士禍) 이후로 사대부가 도학(道學)을 말하기를 꺼렸으나, 공은 능히 분발하여 스스로 뜻을 세운 것이 본디 뛰어났었는데, 늦게야 비로소 퇴계(退溪)의 문하에 수업을 청하였다. 선생이 바야흐로 손수 주자(朱子)의 글을 초록(抄錄)하다가 돌아보고 공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학문의 근기(根基)가 된다.” 하였다. 작별에 임하여 시 다섯 장(章)을 주고 장려하는 것이 매우 지극하였다. 융경(隆慶, 명 목종(明穆宗)의 연호)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에 진사가 되었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이 감사(監司)이었을 때에 (조정에서) 인재를 찾았는데, 공으로 명에 응하였다.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고 헌릉(獻陵)으로 옮겼으나 이윽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는데 다시 빙고 별좌(氷庫別坐)에 제수되었다. 이때 나라에 세자가 없고 왕자를 보도할 스승을 찾는 일이 급하였는데, 공과 하낙(河洛)이 사부(師傅)가 되었다. 글을 강독할 때마다 하낙은 많은 것을 힘쓰고 공은 정(精)한 것을 힘썼는데, 임금이 왕자가 읽는 것을 살펴보고 이르기를, “많으면 정하지 못하니 박 사부를 따라야 한다.” 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어 감찰(監察)로 옮기고, 함열 현감(咸悅縣監)으로 나갔는데 자량(慈良)하고 낙이(樂易)하여 백성이 다 친근하였다. 공무의 여가에는 향학(鄕學)에 가서 고을 자제를 인도하여 함께 강론하였다. 일 때문에 감사의 뜻을 거슬러 파직(罷職)된 뒤에 장원(掌院)을 거쳐 회덕 현감(懷德縣監)이 되었는데, 옥송(獄訟)을 판결할 때에는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또 구차하게 상관의 뜻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곧 파직되어 돌아갔다. 임진왜란 때에 임계영(任啓英) 공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고 또 광해군이 세자로서 감군(監軍)하여 남으로 내려갔을 때에 공이 나아가 뵈고 시사(時事) 10여 조(條)를 아뢰었다. 난이 평정되고서 곡물을 모은 공로로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제수되었는데, 공이 불안해 하며 말하기를, “공이 없는데 감히 그 상을 편안히 여겨 그대로 맡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사실대로 스스로 논열(論列)하여 드디어 명을 거두고 행하지 않으니, 식자가 의롭게 여겼다. 익위(翊衛)에 제수되었으나 한번 사은(謝恩)하고 돌아갔다. 정유 재란 때에 왜구가 또 호남을 침범하였으므로 향리(鄕里) 사람들을 징집하였는데, 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늙었을지라도 감히 한번 죽는 것을 아끼겠는가?” 하였다. 아내 문씨(文氏)가 난중에 별세하고 공의 병도 심하였으나 오히려 능히 충의(忠義)로 스스로 힘써서 군사의 성세가 조금 떨쳤는데, 수령(守令)으로서 새나 짐승처럼 흩어져 숨은 자가 공의 성공을 꺼려서 도리어 저해하고 좌절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거하였는데, 이때가 11월 18일이며 수는 72세이었다. 그 고을 사곡(沙谷)의 간좌(艮坐)인 언덕에 장사하였고, 뒤에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되었다. 공은 집안에서 조행이 완전히 갖추어졌다. 부모를 섬기되 조금도 그 뜻을 어긴 적이 없고 늙어서도 상례(喪禮)를 집행하는 것이 더욱 확고하였으며, 조상에게 봉사(奉祀)하는 데에 독실하고 친족에게 후하였다. 평소에 법도가 매우 엄하였으나, 성심으로 남을 대하여 화기가 애애하였으므로 어질거나 불초하거나 막론하고 다 싫어하지 않았다. 학문은 오로지 자기가 실천하기 위한 것을 힘썼으므로 쌓인 것이 이미 두터워져서 숨겨도 더욱 나타났으며, 남을 가르칠 때에는 먼저 ≪소학(小學)≫으로 하고 상제(喪祭)는 모두 ≪가례(家禮)≫를 따랐다. 대개 한결같이 주자 일문(朱子一門)을 표준으로 삼았는데, 선생이 일찍이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한 질을 주었고 공이 종신토록 읽어서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질의(質疑)≫ 한 책이 있어 세상에 유행한다. 문씨(文氏)는 첨사(僉使) 문양(文亮)의 딸이며, 아들 박근효(朴根孝)는 현감(縣監)이고 박근제(朴根悌)는 참봉이며, 손자는 박진형(朴震亨)ㆍ박익형(朴益亨)ㆍ박분형(朴賁亨)ㆍ박동형(朴同亨)ㆍ박제형(朴濟亨)ㆍ박유형(朴有亨)ㆍ박세형(朴世亨)ㆍ박만형(朴蔓亨)이며, 사위 중에서 현달한 자는 판서(判書) 이광적(李光迪)이며, 나머지는 다 기재하지 않았다. 공이 별세하고 나서 이미 1백여 년이 되어 그 이룬 덕의 깊이는 헤아리기 쉽지 않으나 문인(門人)들의 서술은 오히려 믿을 수 있거니와,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 호남의 명유(名儒)를 논하면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첫째로 삼고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ㆍ일재(一齋, 김감(金勘))ㆍ미암(眉巖, 유희춘) 및 공을 다음으로 삼았다. 그가 좋아하는 데에 아첨하는 자가 아닌데, 공을 칭송한 데에는 또 실천이 독실하다고 하였다. 아! 공과 같은 이는 예전에 이른바 ‘선생과 제자를 알 수 있다’는 것이라 하겠다. 명(銘)은 이러하다. 퇴도(退陶)의 학문은 실로 주자(朱子)에 근본하였으니, 일부(一部)의 ≪절요≫가 곧 그 종지(宗旨)이다. 누구에게 주어야 할 것인가 하면 너일 뿐이다 하니, 공이 일어나서 절하고 ‘소자는 변변치 못합니다’ 하였다. 정성을 쌓고 마음을 다하여 여기에 가까워졌으나, 얼마 안되는 사이에 낭패하여 운명하고야 말았다. 내가 그 행한 것을 살피건대 효성은 시종(始終)이 있으며 의리는 임금을 뒤로 하지 않고 충성은 죽음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사람의 도리 중에서 큰 것이 요는 이것을 벗어나지 않거니와,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아! 어질다. 오직 공의 덕행(德行)에는 본말(本末)이 있으니, 내가 우산(牛山)의 말에 의거하여 그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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