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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본 정경세(鄭經世) 우복선생문집(愚伏先生文集)권3,4 1책 > 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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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본 정경세(鄭經世) 우복선생문집(愚伏先生文集)권3,4 1책 요약정보 및 구매

목판본 정경세(鄭經世) 우복선생문집(愚伏先生文集)권3,4 1책(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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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본 정경세(鄭經世) 우복선생문집(愚伏先生文集)권3,4 1책(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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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본 정경세(鄭經世) 우복선생문집(愚伏先生文集)권3,4 1책 상태좋음 크기:31.3*21센치 보21-3-3 **정경세(鄭經世) 1563(명종 18)∼1633(인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아버지는 좌찬성 여관(汝寬)이며, 어머니는 합천 이씨(陜川李氏)로 가(軻)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주가 있어 7세에 ≪사략 史略≫을 읽고 8세에 ≪소학≫을 배웠는데, 불과 절반도 배우기 전에 문리가 통해 그 나머지 글은 스스로 해독했다고 한다. 1578년(선조 11) 경상도 향시(鄕試)에 응시해 생원과 진사의 초시에 합격했고, 1580년 유성룡의 제자가 되어 학문에 진력하였다. 1582년 회시(會試)에서 진사에 뽑히고 1586년 알성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588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가 곧 통사랑대교로 승진되었다. 1596년 이조좌랑에 시강원문학을 겸했으며, 한때 잠시 영남어사의 특명을 받아 어왜진영(禦倭鎭營)의 각처를 순시하고 돌아와 홍문관교리에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임하였다. 곧이어 이조정랑·시강원문학을 겸하였다. 정랑의 직에 있을 때에 인사 행정이 공정해 현사(賢邪)를 엄선, 임용 또는 퇴출했으며, 특정인에게 경중을 둔 일이 없었다. 1598년 2월에 승정원우승지로, 3월에는 좌승지로 승진되었고, 4월에는 경상감사로 나갔다. 경상감사 재임 시에는 영남 일대가 임진왜란의 여독으로 민력(民力)이 고갈되고 인심이 각박해진 것을 잘 다스려, 도민을 너그럽게 무마하면서 양곡을 적기에 잘 공급해 주고, 민풍(民風)의 교화에 힘써 도내가 점차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1600년 영해부사가 되자, 이 고을 풍습이 싸움을 잘하고, 남을 모략하는 투서가 심함을 알고 이를 근절시켜 민풍을 일신시켰다. 그 해 겨울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 사이에 몇 번의 소명을 받았으나 잠시 상경했다가 다시 귀향하였다. 당시는 당쟁의 풍랑으로 정계는 자못 시끄러웠다. 정경세는 이 때를 기해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마을에 존애원(存愛院)을 설치, 사람들의 병을 무료로 진료하였다. 그는 도학(道學)이 정몽주(鄭夢周)에서 창시해 이황(李滉)에서 집성했으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 같은 여러 현인들이 나와 정학(正學)으로 더욱 깊이 연구함에, 이들 주변 수백 리 안에서 왕성한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그는 상주는 영남의 상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 곳에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유생을 설득해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건하였다. 이 곳에 오현(五賢)을 종사(從祀)해 후학으로 하여금 도학의 정통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하였다. 1607년 대구부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고, 이듬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교서를 내려 정경세에게 구언(求言)하였다. 그는 이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사치의 풍습을 경계하고 인물의 전형을 공정히 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1609년(광해군 1) 봄에 동지사로 명나라에 가서 다음 해에 돌아오면서 화약(火藥)의 매입을 예년의 갑절로 하도록 병부(兵部)에 글을 올렸다. 명나라와 교섭하여 그 수입에 진력하였으므로 특지(特旨)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칭호를 받았다. 그 해 4월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10월에 외직을 원해 나주 목사에 임명되어 12월 부임하는 날 다시 전라감사로 영전되었다. 그 뒤 도정(道政)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8월에 정인홍(鄭仁弘) 일당의 사간원 탄핵으로 해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일변되자 3월에 홍문관부제학이 제수되었다. 그 뒤 대사헌·승정원도승지·의정부참찬·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공도(公道)를 확장하고 요행을 억제하며, 인재를 널리 취하고 사론(士論)을 조정해 국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정경세의 학문은 주자학에 본원을 두고,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평소에 주자(朱子)를 흠모하고 존경했다. 주서(朱書)를 편람, 정독해 후진 교육이나 조의(朝議)에서나 경연에서 진강할 때 주서에 근거를 두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양정편 養正篇≫은 주자가 편찬한 ≪소학≫과 표리가 되고, ≪주문작해 朱文酌海≫는 이황이 편찬한 ≪주서절요 朱書節要≫와 표리가 되는 것으로 주자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그는 경전에 밝았는데,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제자로는 전명룡(全命龍)·신석번(申碩蕃)·강진룡(姜震龍)·황뉴(黃紐)·홍호(洪鎬) 등이 있다. 저서로는 ≪우복집≫·≪상례참고 喪禮參考≫·≪주문작해≫가 있다.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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