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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활자본 성삼문(成三問) 매죽헌선생문집(梅竹軒先生文集)1책완질(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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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활자본 성삼문(成三問) 매죽헌선생문집(梅竹軒先生文集)1책완질(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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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활자본 성삼문(成三問) 매죽헌선생문집(梅竹軒先生文集)1책완질 상태좋음 크기:31*20.5센치 보21상1 **1418(세종 즉위년)∼1456(세조 2).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 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의 딸이며, 조선 전기의 문신 ·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이다. 홍주(洪州 : 지금 충남 홍성(洪城))의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날 때 공중에서 “났느냐?”고 세번 묻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삼문(三問)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서울에서 그가 거주한 곳은 장원서(掌苑署) 앞의 현재 종로구 화동(花洞) 23번지 정독도서관(正讀圖書館) 부근이었다(1986년 서울시에서는 그가 거주하던 곳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표석(標石)을 설치하여 놓았다). 세종 20년(1438)에 생원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하고, 세종 24년(1442)에 삼각산(三角山) 진관사(津寬寺)에서 박팽년(朴彭年) · 신숙주(申叔舟) · 하위지(河緯地)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세종 29년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이후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로 뽑혀 수찬(修撰) · 직 집현전(直集賢殿)으로 올라갔다. 이때 세종의 명에 따라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하였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항상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두터운 사랑을 받았다. 또한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에 정음청(正音廳)에서 정인지(鄭麟趾) · 최항(崔恒) · 박팽년 · 신숙주 · 이개(李塏) 등과 이에 참여하였는데, 특히 당시 요동(遼東)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전후 13번이나 왕래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하고,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 오는 등 정확을 기함으로써 세종 28년(1446) 훈민정음을 반포하는데 공로가 많았다. 세종이 말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도 으례 그와 신숙주 · 박팽년 등을 따르게 하여 고문으로 삼으니 당시 사람들은 그를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였고, 세종과 그 뒤를 이은 문종으로부터 나이 어린 단종의 보필을 늘 당부받아 왔다. 단종 1년(1453) 좌사간(左司諫)으로 있을 때에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황보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으면서 그 추종자들과 함께 집현전 신하들에게도 정난공신(靖難功臣)의 호를 내리자, 여러 학사들이 돌아가며 잔치를 베풀고 자축하였으나, 그는 혼자 그 호를 받음을 수치로 알고 잔치를 열지 않았으며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듬해에 집현전 부제학이 되고 이어 예조 참의를 거쳐, 단종 3년(1455) 예방 승지가 되었다. 이해 윤6월에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하여 선위(禪位)를 강요할 때에 그가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만좌 중에 통곡하였다. 이듬해 그는 좌부승지로서 아버지 성승과 함께 박중림(朴仲林) · 박팽년 · 유응부(兪應孚) · 허조(許?) · 이개 · 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해서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하면서 거사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해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창덕궁(昌德宮)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만찬회를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가 세조의 행사변경으로 여의치 않자 거사일을 뒷날로 다시 정하였다. 이에 함께 모의 하였던 김질(金?)이 실패를 염려하고 변심하여 세조에게 밀고, 발각되어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떳떳하게 시인하고 세조의 불의를 꾸짖었다. 이때 세조가 “너희들이 어찌 나에게 반역을 하는가?”고 묻자 그는 “오직 옛 임금을 다시 모시고자 하였을 뿐, 천하의 그 누가 제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소. 그러하거늘 나리께서 어찌 도리어 반역이라 하시오. 내가 거사하려는 것은 하늘에 해가 둘이 없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하고 세조를 왕이라 하지도 않고 대답하였다. 이에 세조가 “그대가 나를 보고 임금이라 하지 않고 나리라 하니 나의 녹(祿)을 먹고 나에게 배반하였으니 어찌 반역이 아니라 하는가”고 하매 그는 “상왕께서 계신데 나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 하시오. 또 나는 나리의 녹을 먹지 않았소이다. 내 집을 뒤져 보시오”하였다. 이에 세조가 더욱 노하여 모진 고문을 가하였으나 그는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달 8일에 아버지 승과 이개 · 하위지 등과 함께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였고, 성삼빙(成三聘) · 성삼고(成三顧) · 성삼성(成三省) 등 동생과 성맹첨(成孟瞻) · 성맹년(成孟年) 등 아들 4명도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그가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는 거적자리가 깔려 있을 뿐이었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 처형된 후 세조는 그들을 가리켜 “금세(今世)의 난신(亂臣)이요, 만세(萬世)의 충신(忠臣)이로다”고 탄복하였다. 그뒤 그를 포함한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 왔으며, 그들의 신원(伸老)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숙종 17년(1691)에 이르러 그들의 관직이 회복되었다. 영조 34년(1758)에 다시 이조 판서에 증직(贈職)되었고, 정조 15년(1791)에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그는 사람 됨됨이가 즐겨 우스개 소리를 잘하고 호탕하여 평상시에 앉고 서는데 아무런 절제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속으로 그 마음가짐은 굳굳해서 아무도 그의 뜻을 꺾지 못하였다. 또한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서 저술의 명을 받아 이에 종사한 바가 많았으니 《동국정운(東國正韻)》을 제진(製進)하였고,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 · 《훈세평화(訓世評靴8》 · 《홍무정운(洪武正韻)》 등의 교역(校譯)과 《역대병요(歷代兵要)》등의 서적을 찬술하였으며, 《세종실록(世宗實錄)》 찬수에도 참가하였다. 저서로는 〈매죽헌부(梅竹軒賦)〉가 들어 있는 《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다. 그의 묘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역에 있는데, 그의 일지(一支)를 묻었다는 묘가 충남 논산에도 있다. 사육신 묘역은 1978년에 사육신 공원으로 단장되어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그는 동작구 노량진에 있던 민절서원(愍節書院)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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