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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민당선생문집(无悶堂先生文集)5책완질 박인(朴絪)
    무민당선생문집(无悶
    0
  • 목활자본 김유신(金庾信) 각우선생실기(角于先生實記)권1 1책
    목활자본 김유신(金
    150,000
  • 중국목판본 시전(詩傳) 1책
    중국목판본 시전(詩
    20,000
  • 1984년 음악동아 10월호
    1984년 음악동아
    50,000
  • 1970년 한국명가필보(韓國名家筆譜) 1책완질
    1970년 한국명가
    50,000
  • 1963년 계상국민학교 졸업기념 사진
    1963년 계상국민
    20,000
  • 묵직한 청동으로된 악사가 조각된 향로
    묵직한 청동으로된
    189,000
  • 석판본 도남문집(道南文集) 2권1책완질
    석판본 도남문집(道
    30,000
  • 1994년초판 홍기,홍금보만화 일지매 1
    1994년초판 홍기
    20,000
  • 조선시대 고필사본 시집
    조선시대 고필사본
    30,000
  • 1941년 주자어류절요(朱子語類節要) 3책
    1941년 주자어류
    450,000
  • 보석이 장식된 반지
    보석이 장식된 반지
    10,000
  • 1930년 영산간행 곽종석(郭鐘錫) 면서휘식(면書彙式)1책완질
    1930년 영산간행
    200,000
  • 1997년 일엽스님 스님 참 웃기네요
    1997년 일엽스님
    10,000
  • 679-미개봉 테이프 U2 WAR
    679-미개봉 테이
    10,000
  • 해동명가척독(海東名家尺牘)1책완질
    해동명가척독(海東名
    0
  • 목판본 戊子新刊 嶺營藏板 대학언해(大學諺解) 1책완질
    목판본 戊子新刊 嶺
    50,000
  • 연대가좋은 이마리 청화백자화문 화형완 3점
    연대가좋은 이마리
    20,000
  • 1969년 경상북도한의사회 한의학회보 제34호
    1969년 경상북도
    50,000
  • 1941년 조선총독부 초등농업서권2,자급비료(自給肥料)1책 합본
    1941년 조선총독
    0
  • 1963년 사상계(思想界) 1월호
    1963년 사상계(
    50,000
  • 1989년 주간매경 7월6일자
    1989년 주간매경
    30,000
  • 1961년 농민총서 목화재배법
    1961년 농민총서
    50,000
  • 자수정으로된 염주
    자수정으로된 염주
    29,000
  • 청자해무리굽 자완
    청자해무리굽 자완
    150,000
  • 1999년 알렉산드라 셀러스 백만장자와 결혼하기
    1999년 알렉산드
    5,000
  • 흑유청자 호
    흑유청자 호
    69,000
  • 1963년 경상북도 재건 86호
    1963년 경상북도
    50,000
  • 금속재질로된 우편자동차 시계
    금속재질로된 우편자
    29,000
  • 시가라끼 청자 소호
    시가라끼 청자 소호
    15,000
  • 2002년 한국판 NEW TYPE 9월호
    2002년 한국판
    50,000
  • 1985년 밀양예술제 팜플렛
    1985년 밀양예술
    20,000
  • 1909년 경북청도간행 성삼문(成三問) 매죽헌선생문집(梅竹軒先生文集)권1,2 1책
    1909년 경북청도
    150,000
  • 1994년 엄마가 들려 주는 옛날이야기
    1994년 엄마가
    10,000
  • 1996년 대구대학교 교수작품전 도록
    1996년 대구대학
    20,000
  • 1159-미개봉 테이프 UNTITLE
    1159-미개봉 테
    10,000
  • 나무로된 소형함 2점
    나무로된 소형함 2
    10,000
  • 흑곤옥돌로된 제비옥 조각
    흑곤옥돌로된 제비옥
    59,000
  • 9-일제시기 군관련 기념잔
    9-일제시기 군관련
    10,000
  • 32-종이바닥에 글 족자
    32-종이바닥에 글
    59,000
  • 증보단방신편(增補單方新編)1책완질
    증보단방신편(增補單
    0
  • 묵직한 금속재질로된 꽃꽂이용 받침
    묵직한 금속재질로된
    15,000
  • 1999년 정보국,이다원 공저 운명
    1999년 정보국,
    10,000
  • 100년이상된 고이마리 청화백자 잔
    100년이상된 고이
    15,000
  • 1974년 민애니 만화 큰오빠 3책완질
    1974년 민애니
    1,800,000
  • 1984년 한국찬송가공회 찬송가
    1984년 한국찬송
    20,000
  • 1418-미개봉 테이프 마리아 칼라스 라 디비나2집
    1418-미개봉 테
    20,000
  • 1942년초판 현대바둑의 창시자 우칭위안(吳淸源) 수필(隨筆)
    1942년초판 현대
    1,500,000
  • 2004년 만화잡지 윙크 7월15일자
    2004년 만화잡지
    30,000
  • 조선시대 木板本 사한일통(史漢一統)권3 1책
    조선시대 木板本 사
    100,000
  • 목걸이
    목걸이
    15,000
  • 일본간행 영화 팜플렛
    일본간행 영화 팜플
    20,000
  • 조선시대 판각이 좋은 목판본 대학언해 1책완질
    조선시대 판각이 좋
    100,000
  • 백자 정자완
    백자 정자완
    180,000
  • 흑유 라꾸 청자 말찻잔
    흑유 라꾸 청자 말
    59,000
  • 1989년 귀성 제10집
    1989년 귀성 제
    30,000
  • 1954년초판 김요섭시집 체중(體重)
    1954년초판 김요
    500,000
  • 일본궁내부에 납품되던 심천(深川) 청화백자산수문금채 잔 3점
    일본궁내부에 납품되
    59,000
  • 아리따야끼(有田) 청화백자 조화문 대완
    아리따야끼(有田)
    59,000
  • 2001년 곽광택 친구에게 주는 사람의 말
    2001년 곽광택
    10,000
  • 경덕진요 청자 청유 주자호
    경덕진요 청자 청유
    39,000
  • 1995년초판 코난 도일 박친식옮김 흡혈귀의 정체
    1995년초판 코난
    20,000
  • 연대가좋은 청자 청화화문 조개껍질모양 완
    연대가좋은 청자 청
    39,000
  • 백자 금채화문 이귀차호
    백자 금채화문 이귀
    20,000
  • 1990년 협동의 횃불
    1990년 협동의
    20,000
  • 1993년 이선희 유아정신위생
    1993년 이선희
    10,000
  • 자사도자기 양각호랑이문 다관
    자사도자기 양각호랑
    129,000
  • 1979년 에밀 아자르 달려라 모모
    1979년 에밀 아
    50,000
  • 1983년 국민학교 미술 5
    1983년 국민학교
    50,000
  • 돌을 조각한 원숭이상(안듣고 안보고 안말하고)
    돌을 조각한 원숭이
    120,000
  • 직접그린그림의 이태리산 청자사족 합
    직접그린그림의 이태
    39,000
  • 프랑스산 하비랜드 커피잔셋트 2점
    프랑스산 하비랜드
    49,000
  • 2000년 박정민 내사랑이 그대마음에 쌓일수 있다면
    2000년 박정민
    10,000
  • 전운옥편(全韻玉篇) 하권 1책
    전운옥편(全韻玉篇)
    100,000
  • 2000년 세계의 국가 동남아시아 올칼라판 도록
    2000년 세계의
    20,000
  • 1976년 영화백과 제1집
    1976년 영화백과
    200,000
  • 1980년대 병충해방제기술 수도편
    1980년대 병충해
    20,000
  • 2012년 션 케니프 꿈꾸는 황소
    2012년 션 케니
    15,000
  • 2007년 양원석 화철령시오리
    2007년 양원석
    20,000
  • 1985년 병인년대한민력
    1985년 병인년대
    20,000
  • 1991년 앤타일러 종이시계
    1991년 앤타일러
    20,000
  • 1978년 동국대학교 박물관도록
    1978년 동국대학
    22,500
  • 1981년 즐거운 겨울생활
    1981년 즐거운
    50,000
  • 대나무로된 화도용 화병
    대나무로된 화도용
    39,000
  • 소형크기의 반가사유상 2점
    소형크기의 반가사유
    15,000
  • 여봉 수결이 있는 청화백자동자문 잔
    여봉 수결이 있는
    15,000
  • 17-청자 커피잔
    17-청자 커피잔
    10,000
  • 연대가좋은 청화백자 배문완
    연대가좋은 청화백자
    10,000
  • 청자 소호
    청자 소호
    10,000
  • 1983년 서울의대교향악단 정기연주회 팜플렛,입장권 3장
    1983년 서울의대
    30,000
  • 1924년(대정13년) 홍엽회(紅葉會) 도록
    1924년(대정13
    100,000
  • 1995년 한겨레21 2월16일자
    1995년 한겨레2
    20,000
  • 2003년초판 전극진만화 열혈강호 32
    2003년초판 전극
    10,000
  • 연대가좋은 백자 철화화문 다완
    연대가좋은 백자 철
    10,000
  • 분청자 철화초화문 자완
    분청자 철화초화문
    20,000
  • 유화도정교수지장
    유화도정교수지장
    15,000
  • 1993년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앙과 신학
    1993년 여의도순
    20,000
  • 연대가좋은 청화백자 잔 3점
    연대가좋은 청화백자
    11,000
  • 골동-묵직한 청동으로된 코끼리 등잔
    골동-묵직한 청동으
    69,000
  • 1967년 화순최씨종친명부(和順崔氏宗親名簿)
    1967년 화순최씨
    50,000
  • 1997년 류시화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1997년 류시화시
    20,000
  • 청동으로된 침향 향로
    청동으로된 침향 향
    39,000
  • 1941년 日本刊 각과 학습서
    1941년 日本刊
    20,000
  • 1956년 후랑소아즈 사강 어떤 미소
    1956년 후랑소아
    80,000
  • 청자 자완
    청자 자완
    10,000
  • 1988년 공연예술총서 연기
    1988년 공연예술
    20,000
  • 1999년 삼성문화재단 문화와 나
    1999년 삼성문화
    20,000
  • 초창기 본챠이나 금채화문 커피잔셋트
    초창기 본챠이나 금
    39,000
  • 연활자본 김도화(金道和) 척암선생별집(拓菴先生別集)2권2책완질
    연활자본 김도화(金
    300,000
  • 골동-宗甫 청동양각조화문 화병
    골동-宗甫 청동양각
    49,000
  • 원목나무에 칠이된 차탁 4점
    원목나무에 칠이된
    10,000
  • 묵직한 청동통으로된 부처님 호신좌불상
    묵직한 청동통으로된
    29,000
  • 명품-이마리 평안운천(平安雲泉) 청화백자화문 커피잔 6점셋트
    명품-이마리 평안운
    259,000
  • 1954년 논문작법요결
    1954년 논문작법
    30,000
  • 고사스마 대산(大山) 진사청자 금채화문 5인 다관셋트
    고사스마 대산(大山
    259,000
  • 2000년초판 김광일 참 멋진놈 하나 만났더라
    2000년초판 김광
    10,000
  • 1549-근대사 미사용 테이프 김성무
    1549-근대사 미
    20,000
  • 1989년 한국단학선도협회 단학(丹學)
    1989년 한국단학
    40,000
  • 1980년 우크레레첫걸음
    1980년 우크레레
    40,000
  • 묵직한 금속칠보로된 차탁 3점
    묵직한 금속칠보로된
    15,000
  • 연대가좋은 청동으로된 잔
    연대가좋은 청동으로
    39,000
  • 1978년초판 에리히 프롬 유기성역 파괴란 무엇인가
    1978년초판 에리
    40,000
  • 1955년 고등국어 1
    1955년 고등국어
    80,000
  • 흑유청자 각진멘도리 소호
    흑유청자 각진멘도리
    15,000
  • 1980년 주간경향 8월24일자
    1980년 주간경향
    50,000
  • 1961년(단기4294년) 대한민국참의원사무처 참의원보(參議院報) 창간호
    1961년(단기42
    600,000
  • 1976년 이종진 만화 답답한 세녀석 3책완질
    1976년 이종진
    1,800,000
  • 1968년 인천축현국민학교 제22회 졸업기념 앨범
    1968년 인천축현
    50,000
  • 목판본 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 1책
    목판본 동국문헌록(
    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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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고서적
1,114,050,000원/2,762건
교과서
439,185,000원/5,449건
간찰
70,335,000원/1,253건
한국미술품
424,034,500원/3,608건
일본미술품
1,002,900,500원/23,724건
중국미술품
511,090,000원/9,806건
기타
1,083,094,500원/11,335건
전체합계
11,766,980,500원/116,216건
무민당선생문집(无悶堂先生文集)5책완질 박인(朴絪) > 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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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당선생문집(无悶堂先生文集)5책완질 박인(朴絪) 요약정보 및 구매

무민당선생문집(无悶堂先生文集)5책완질 박인(朴絪)(1789년 목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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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당선생문집(无悶堂先生文集)5책완질 박인(朴絪)(1789년 목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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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목판본으로 간행된 박인(朴絪)선생의 무민당선생문집(无悶堂先生文集)5책완질 상태좋으며 파장없음 크기:29.5*19.8센치 **박인(朴絪, 1583-1640)은 선조 16년 계미(1583; 황명 신종황제 만력 11년) 12월 6일 갑인 진시에 야로현 우거촌(일명 우계촌, 현 야로면 하림리)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관향은 고령(高靈)이고, 자는 백화(伯和)이며, 호는 스스로 임헌(臨軒)이라고 하였다가 인조 15년(1637, 정축)에 뜻한 바 있어 무민당(无悶堂)으로 고쳤다. 중시조인 환(還)을 1세로하여 2세인 동신(東臣)은 고려조에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내고서 11세손 윤빈(允斌)은 신령현감(新寧縣監)을 지냈으니 5세조이다. 고려 관(寬)은 기자전(箕子殿) 참봉이고 증조 순신(舜臣)은 군자감 주부(軍資監 主簿)이다. 조부 충노(忠老)는 일찍 별세하여 드러나지 아니하고 선고 수종(壽宗)은 용사(龍蛇)의 난에 창기하여 의진(義陣)에 참여한 창의장이며 성균 생원이다. 어머니는 강우의 문한가로 알려진 서산인 정건(鄭健)의 딸이었다. 박인은 남명선생의 고족(高足)이면서 강우사림의 종장인 외종숙 내암 정인홍(1535∼1623)선생 문하에 입문하여 고고탁절한 기상과 ‘敬義之學’의 요체를 탐구하였으며, 당시 내암의 명성을 듣고 모인 문하생들과 종유하기도 하였다. 박인의 생애와 사상은 『무민당선생문집』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으며, 『무민당선생문집』은 시문집으로서 9권 5책(「본집」 7권 4책, 「별집」 2권 1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이는 1789년(정조 13) 사림파 5대손인 성림(聖林) 등이 편집·간행한 것이며, 문집구성은 다음과 같다. 권두에는 정종로의 「서문」이 있고, 「별집」의 권말에 성림의 「발문」이 있다. 본집 권1에는 「세계도」,「연보」,「시」 122수가 있으며, 권2·3에는 「서」 68편이 있다. 권4에는 「序」4편, 「記」4편, 「說」4편, 「잡저」3편, 「제문」7편, 「묘비명」1편이 있으며, 권5에는 「남명선생언행총록」과 「남명선생연보」가 있다. 권6·7에는 부록으로 「만장」29수, 「제문」16편,「행장」2편,「묘갈명」·「묘지」·「용연서원상량문」·「이건시상량문」·「봉안문」·「상향문」·「이건후상향문」 각 1편이 있다. 별집 권1에는 「제영」55수,「언행총록」·「용연서원청액소」 각 1편이 있으며, 권2에는 「사우록」·「문도록」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3세 때(1585, 을유) 박인은 어머니를 잃고 재종조모 형씨(邢氏)의 보살핌으로 자라났다. 5세 때(1587, 정해) 자질과 기량이 고요하고 묵중하며 행동거지가 변함이 없었고, 생원공이 기특히 여기고 사랑했다. 7세 때(1589, 계축) 처음으로 입학하여 글을 읽었다. 선생이 글을 읽음에 품성이 정미하고 영특하여 어려서부터 성인의 거동이 있었다. 10세 때(1592, 임진) 능히 문장을 지어내는 비범한 면모를 보였다. 이 때는 왜놈들이 침략하여 항복하는 자가 많았는데, 선생은 나라 사람의 왜놈됨이 점점 많다하니 유수찬 중룡(仲龍)이 보고 이상히 여겨 말하기를 ‘시의 뜻이 깊고 머니 다른 날에 성취함을 가히 측량치 못한다’고 했다. 11세 때(1593, 계사) 생원공을 따라 성주로 가서 왜놈을 물리쳤다. 이 때 중국 사람이 선생을 보고 뜻이 호걸하고 매진함에 평생 글읽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17세 때(1599, 기해) 고향에 돌아와 글을 읽었다. 이 때 병화로 서적이 탕진하고 曾史에 사권을 얻어 읽었다. 한 권을 다 읽고 문리가 통하여 『논어』와 『맹자』는 다만 의심나고 어려운 곳만 물었다고 한다. 18세 때(1600, 경자) 힘써 배우고 문장이 능숙하여 과거에 통했다. 선생이 학문에 전력하고 의리를 연구하여 밥먹기를 잊어버리듯 하였으며, 뭇 서적을 차례로 해독하여 문장을 지음에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 20세 때(1602, 임인) 명문 순천인 毅愍公 朴而絢(贈 工曹判書)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8남매를 두었다. 21세 때(1603, 계묘, 선조 36년) 생원공이 생원복시에 합격하니 선생이 처음으로 과거에 나아갔다. 8월 임란 때 전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한 덕천서원에 남명선생과 최수우당의 위판 봉안 때 처음으로 남명학파의 회합에 참가하였다. 22세 때(1604, 갑진) 고을시험에 합격했다. 선생이 일등이 되었으나 제2에 남궁에서 낙방되었다. 비록 선고의 권유로 향시에 응시하여 4차례나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아 과업을 일삼지 않았다. 나중에는 어버이의 허락을 받아 순수한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25세 때(1607, 정미) 겨울에 용강(龍岡)촌에 복거했다. 선생이 용강촌에서 복거하고 서실을 잠실(潛室)이라 이름하였다. 그는 이곳을 『주역』 읽는 곳으로 삼고, 구도하는 데 몰두하였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문안하고 물러 나와 잠실에 거처하였으며, 해가 저물도록 꿇어 앉아 글을 읽고 침잠하였다. 이 해에는 내암이 남계(먏?·덕산(德山)·향천(香川) 세 서원의 산장(山長)이 됨으로써 우도 사림의 종장으로서 위치를 확고하게 된 시기였다. 27세 때(1609, 기유, 광해1년) 봄에 고을 시험에 합격했다. 일찍이 선생이 구도하는 뜻이 있어 억지로 과거에 응한 것은 어버이를 위한 것이었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뜻이 없었다. 남명선생의 시 중에서 “티끌 흙이 오장 속에 나면, 지금 곧 배를 따개어 흐르는 물에 씻으리라”는 글귀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생원공에게 과거 폐하기를 청하였다. 생원공이 그 결단을 가상히 여겨 허락함으로써 비로소 성경(聖經)에 잠심하여 몸을 위하는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28세 때(1610, 경술) 임헌(臨軒)이라 자호하였다. 이 호는 『주역』 「臨卦」에 “대개 군자가 가르치는 생각은 무궁하여 백성을 보존함이 가이 없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시를 지어 20년 전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부질없이 귀황을 쫓아 평생을 그르쳤다고 하였다. 29세 때(1611, 신해) 봄에 향약법을 시행했다. 3월에 문묘종사 문제로 남·북인간의 대립이 심각해졌다. 나중에 『산해사우연원록』의 간행이 지연된 것도 당시 대북에 동조하여 오현의 종사를 반대했다는 것이 구실이 되었다. 30세 때(임자, 1612) 가을에 덕천에 가서 남명선생 사우(祠宇)와 묘소를 배알하고 두류산에서 놀았다. 그가 남명선생을 존모하여 유적을 찾고 두류산에 놀면서 법계사에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 겨울에 『근사록』을 읽고 시 한수를 지었다. 31세 때(1613, 계축) 겨울에 정인홍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시 박인은 내암의 외척이자 동향인 이었으며, 존중한 명망을 지고 있었으므로 내암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이 때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대비를 폐할 것을 꾀하니, 박인은 내암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의 불가함을 말하였다. 박인은 당시 계축옥사가 일어나고 우의정의 소명을 받은 내암에게 영창대군의 신구 주청을 품신하기도 하였으며, 내암은 6월과 10월, 11월의 3차례에 걸쳐 영창대군 「신구소」를 주소하고, 15차례나 사직소를 올림으로써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32세 때(1614, 갑인) 겨울에 내암에게 편지를 보냈다. 동계 정온(1569∼1641)이 일에 대하여 정직하게 말하였다가 큰 화에 빠지게 되자, 박인은 글을 보내어 그를 구원할 것을 지극히 말했다. 동계 정온이 「갑인봉사소」를 옹호하는 통문을 돌리므로써 문인간에 분열이 생겼다. 박인은 내암에게 글을 보냈고, 또한 이이첨의 무리가 간사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인륜을 폐하여 법도를 문란하게 함을 피력하였다. 그러자 그는 뭇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으나 조금도 걱정하지 아니하고 태연하였다. 원근에서 이것을 보고 탄복하여 우러러 사모하는 자가 많았다. 강대수(姜大遂, 字 學顔, 號 寒沙; 1591∼1658)에게 글을 주었다. 또한 한사가 일을 말하다가 회양(淮陽)에 귀양가게 되니, 그가 글을 주어 힘쓰게 했다. 34세 때(1616, 병진) 북인이 투서하여 공척함을 입었다. 고령 사림에서 통문을 보내와 성토당했다. 영창대군의 죽음에 관련된 정온의 항소는 당시 정국에 커다란 파문이 일게 되었고, 그를 신구하는 문제와 관련해 권력지향적인 소장문인들과 맞서 대북에서 이탈한 중진세력이 이른바 중북화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폐모론에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나타났다. 37세 때(1619, 기미) 정월에 생원공의 상사를 당했다. 40세 때(1622, 임술) 용강 잠실에 있었다. 선생이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단정하게 앉아 어깨와 등이 솟고 곧아서 마치 그림과 목상 같았다. 종일토록 글을 보아서 성경과 현전을 모두 연구하여 『중용』과 『대학』을 더욱 좋아하여 손수 한부씩 써서 외우고 완색했다. 가을에 두류산에 놀았다. 41세 때(1623, 계해, 인조 원년) 봄에 서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인조반정으로 내암이 억울하게 처형당했다. 이로부터 그는 전일에 있었던 스승 내암에 대한 시비를 말하지 아니하고, “의견이 다름으로써 지나간 허물을 나무라리오. 좇아서 미워하면 군자가 사람을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겨울에 고산정사(孤山精舍)에 가니 하홍도(河弘度, 字 重遠, 號 謙齋; 1593∼1666)가 와서 찾았다. 고산은 정훤(鄭暄, 號 學圃; 1588∼1647)의 정사인데, 겸재가 박인의 이름을 많이 들었으므로 와서 찾은 것이다. 42세 때(1624, 갑자) 유일 천거에 들어갔다. 인조가 반정한 뒤에 유일을 구하니 이윤우(李潤雨, 字 茂伯, 號 石潭; 1569∼1639)가 제일가는 사람으로 박인을 천거했다. 이 해에 영모재(永慕齋)를 낙성했다. 생원공이 일찍이 조동(釣洞)에 정자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했고, 이제 와서 선생이 그곳에 정자를 지어 영모재라 하고, 장서감을 존경감, 외방을 양정당이라 하였다. 그리고 경의 삼성(三省), 사물(四勿), 사무사(思無邪), 신기독(愼其獨), 용잠구연(龍潛九淵), 봉상천인(鳳翔千 ), 천균기력(千勻氣力), 만장광염(萬丈光焰) 등의 글자를 써서 걸었으며, 『성리대전』 중에 요긴한 말을 벽에 써서 붙이고 깊이 연구하여 가절에 사우로 더불어 술을 싣고 배를 타고 시내 못 사이에 연소하여 놀았다. 가을에 조임도(趙任道, 字 致遠, 號 澗松; 1585∼1664)가 방문했다. 겨울에 장렬공(壯烈公) 박영서(朴永緖)를 조문했다. 43세 때(1625, 을축) 여름에 조간송의 글에 답장했다. 간송의 글에 “노형이 일찍 과거를 하직하고 문을 닫아 뜻을 구하여 성경과 현전에 전심하여 연구하고 옛 사람의 행실과 말씀을 몸에 돌이켜 실천하니, 이것이 임도가 추종하여 가르침을 받고저 하되 길이 멀어서 종유하기가 쉽지 아니하고 한갓 북두칠성 같은 바램만 부지런하고 봄바람 같은 좌석을 가까이 못한다”고 하였다. 가을에 선생이 꿈에 한 글귀를 얻었다. 즉 “오랑캐의 말이 지금 한강물을 엿보니 이는 당나귀가 죽도록 화산에서 늙는다”고 했다. 명년 정묘에 한 이의 계병이 국경을 침범하니 선생이 탄식하되 “난리가 나기전에 징조가 먼저 보이니 지극히 신령한 것이 어찌 마음이 아니리요. 내가 암혈에서 늙어 죽을 것을 여기서 안다”고 하였다. 44세 때(1626, 병인)에 남계 이중무(枏溪 李重茂)의 편지에 답장했다. 이 때 동계가 경상도 감사가 되자 선비들이 한훤당의 서원을 군북 지동암(志同岩)에 건립하고자 하여 남계가 편지하여 의논하니 무민당이 답장했다. 45세 때(1627, 정묘) 봄에 북노(北虜)가 의주(西鄙)를 침범하여 임금이 강도에 피난했다. 태학에 올라 천거를 행했다. 우복 정경세(字 경인)가 전랑이 되어 선생의 행의가 높고 일을 미리 아는 소견이 있다함을 듣고 험난을 당하여 고치지 아니하고, 도를 지키어 즐거워함으로써 천거했다. 영모록을 이루었다. 이흘(李屹, 字 山立, 號 蘆坡; 1557∼1627)을 조상했다. 46세 때(1628, 무진) 봄에 덕산에 가니 칠원 조차마(漆源 曺次磨; 1557∼1639)가 남명선생의 「연보」와 「사우록」을 부탁했다. 신도비의 비문을 내암에게 청하였으며, 내암이 정형(正刑)되었을 때는 정온과 상의하여 시신을 걷어 매장하였다고 한다. 47세 때(1629, 기사) 가을에 벽연재(壁淵齋)를 낙성하고, 다음해 5월에는 사옹원(司饔院)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49세 때(1631, 신미) 수암 유진(修巖 柳袗, 西厓의 셋째 아들, 1582∼1635)이 합천 군수로 부임하여 동왕 11년까지의 재임기간 동안 『西厓集』의 간행을 추진하였다. 수암은 도임하자 스스로 무민당을 찾아와서 道義之交를 맺고, 재임 중 군민들이 일으킨 고의적인 재난에 직면할 때마다 무민당과 상의해서 자신의 진퇴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50세 때(1632, 임신) 7월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51세 때(1633, 계유) 봄 용연재(龍淵齋)를 낙성했다. 덕산을 방문하여 조모정(曺慕亭)과 만나 「남명선생연보」와 『산해사우연원록』의 저술에 대해 논의했다. 『산해사우연원록』의 편찬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해 정동계(鄭桐溪)가 용암서원(龍巖書院)의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52세 때(1634, 갑술) 정동계가 거창의 용천정사(龍泉精舍)에 있을 때 연하장을 보냈다. 그 연하장에는 남명학파의 명맥을 유지 계승하고 있는 인물을 동계(桐溪)로 보았으며, 남명에 대한 세간의 시의에 굴하지 않았다. 또한 그 도학의 순정함을 변호 홍보하기 위해서는 남명의 교우나 문인들이 모두 당시의 현인 군자였음을 알리는 『師友錄』을 편찬해서 보급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하였다. 53세 때(1635, 을해) 『주역』 64괘와 「태극도」를 직접 기록했다. 가을에 회연서원(檜淵書院)을 배알하고 입암(立岩)에서 놀았다. 54세 때(1636, 병자) 2월 혼신의 노력으로 『산해사우연원록』을 탈고하여 정사(淨寫)를 마쳤다. 그 후에도 수정 작업은 계속되었지만, 훗날 간행에 이르기까지는 무민당 사후 우도 유림의 동향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때 무민당은 안질(眼疾)에다가 8∼9년전부터 산증(疝症)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특히 지난 겨울부터 병세는 더욱 심각하여 작업에 커다란 지장을 주었으며, 출입에도 부자유스러웠고 4년 뒤 세상을 떠나는 원인이 되었다. 12월 북노가 서울을 침범함을 듣고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동생 위(緯)에게 부탁하여 의장의 처소에 보냈다. 55세 때(1637, 정축) 정월 조정이 북노와 더불어 강화함을 듣자, 삼전도의 국치 후 당명을 고쳐 무민당(无悶堂)이라 하고 문을 절호문(節戶門)이라 하였다. 무민당이라는 말은 정묘·병자·재차의 호란 끝에 정월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수강단(受降檀)을 쌓고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쳤다고 하니 이는 ‘대개 나가지 아니하면 허물이 없다’는 의미에서 취한 것이다. 57세 때(1639, 기묘) 봄에 벽한정(碧寒亭; 오늘날 1996년 3월 11일 경상남도문화재 제233호로 지정)이 낙성되었다. 가을에 심양(瀋陽)에 인질로 가 있는 세자에게 보내는 회포를 읊은 내용인 두견시(杜鵑詩)를 지었다. 58세 때(1640, 경진, 인조 18년) 11월 10일 학포 정훤의 고산정사(孤山精舍; 진양군 대평면 대평리)에서 58세를 일기로 고종(考終)했다. 무민당의 행장은 조간송과 임임곡이 찬술했다. 효종 10년(1658, 무술)에는 사림들이 유덕을 기려 용연서원(龍淵書院)을 창건하여 배향하였다. 숙종 17년(1690, 경오)에는 영남사림 동암 주채(東巖 周采) 등 800여인의 용연서원 사액소청이 저지되었으며, 그 소두인이 삭적의 처분을 받게된 것도 남인과 대립한 전력을 문제 삼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상의 연보를 통해서 무민당의 남명학파로서의 면모는 『산해사우연원록』과 「남명선생연보」, 그리고 「언행총록」의 편찬 및 간행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무민당이 찬한 「남명연보」는 원래 중요한 일이 있었을 때만 그 해와 나이를 아울러 적고, 그렇지 못한 해에는 남명에 관한 아무런 기록도 없는 조략한 형태로 된 것이었다. 이는 탈고 후 「姜令公」(姜寒沙)에 의해 한 두 차례 교정이 가해 진 바 있었으나 여전히 중요한 사실의 기술에 누락이 있을 뿐 아니라 年所가 잘못 수록된 곳도 남아 있다. 『산해사우연원록』은 남명 조식의 사우록으로서 인조년간에 무민당에 의해 편찬된 것이다. 이 『산해사우연원록』은 무민당의 사후 수년, 강대수(姜大遂, 字 學顔, 號 寒沙; 1591∼1658)의 원장 재임 기간 중 덕천서원을 중심으로 이 작업이 추진되고 있었다. 『산해사우연원록』은 성순(成錞, 字 而振, 號 川齋, 1590∼1659; 浮査 成汝信의 第四子이자 凌虛 朴敏의 사위)의 『川齋遺稿』에 수록된 「行狀」·「墓碣銘」 등에 河謙齋 및 제현과 더불어 이 「사우록」을 수교(綴?하여 입재(入梓)했다(『謙齋集』 「사우문도록」 成而振條)는 기록이 보이며, 朴无悶堂·河謙齋·趙澗松 등이 『남명집』 및 『학기유편』을 논정하기도 하였다(『德川師友淵源錄』 권6의 崔絅條)고 한다. 무민당의 임종을 지켜본 정훤은 무민당이 卒한 다음해에 찬한 「再祭朴伯和文」(『學圃集』 卷4)에는 무민당의 문집 및 유저인 『산해사우연원록』의 간행이 논의되고 있었으나 좌절되었다고 한다. 「제문」에서는 무민당의 몰후 19년째인 효종 9년에 그를 제향하는 용연향사(龍淵鄕祠)의 건립이 시도될 무렵부터 현종 10년·숙종 17년에 걸쳐 무민당의 정치적 입장, 혹은 소속당파에 관한 평가를 둘러싼 대립이 통문전과 관부(官府)의 소지전(所志戰; 歎願書)의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숙종 17년의 경우에는 용연서원의 사액소청이 저지되고 그 소두인(疏頭人)이 삭적의 처분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무민당집』의 별집 권2에 있는 「언행총록」이 문집 권5의 부록에도 있으며, 여기에 수록된 내용은 대부분 문집의 부록 등에서 절취해 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별집 권2는 그 내용의 대부분이 문집의 권5 등과 중복되고 있다. 이것은 결국 무민당의 『산해사우연원록』이 남명별집의 형태로 간행되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문집의 별집과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르므로, 독립적인 저술로서의 원래 형태를 유지하여 별행본으로서도 통행될 수 있도록 배려하였음을 나타낸다. 필사본인 『산해사우연원록』의 권2는 「남명조선생」편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는 김동강(金東岡)이 찬한 「행장」과 성대곡(成大谷)의 「묘비문」, 그리고 무민당의 「언행총록」과 「붕우서술」이 차례로 수록되어 있으며, 별집에 이르러서는 「행장」과 「묘비문」이 허미수(許眉?와 조용주(趙龍洲)의 「신도비문」 및 정동계에 의한 학기 「발문」으로 대체되었다. 무민당을 비판하는 측이 그에게 가한 죄목은 한결같이 광해군 때 대북에 동조하여 五賢의 종사를 반대했다(『卞誣錄』 所收 儒生呈書)는 것이었다. 무민당처럼 내암의 문도로부터 출문의 처분을 당한 인물에 있어서조차 그 이전의 남인과 대립했던 전력이 오랫동안 문제시되고 있음은 그것이 『산해사우연원록』의 출판이 지연된 배경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의 해체 내지 전반적인 남인화가 불가피했던 사정을 시사해 주고 있다(이상 『산해사우연원록』의 편찬 및 간행에 관해서는 吳二煥 교수의 「『南冥集』諸板本の成立とその思想史的背景-17·8世紀の刊本を中心として-」을 참고). 무민당은 당시 남명에 관한 불리한 시대·정치적 상황과 건강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사실의 객관적 기술을 위해 노력하였다. 대북정권이 몰락하자 대북의 허물을 그들이 존숭한 남명의 학문내용에까지 추급해서 이것을 폄하하는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남명의 연원가에서 조차 자신들의 父祖 혹은 師門이 남명의 학통인 것을 감추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후 남명학파의 잔여세력들은 학파의 연원을 내암의 관련기사나 이름을 문집에서 삭제하기에 바빴으며, 당시 남인적인 시각에서 좌·우도의 대립에 관련된 민감한 부분을 가능한한 삭제 혹은 축소하여 초고의 모습을 변질시키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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