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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 근대사자료(1905년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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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 근대사자료(1905년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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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재(淵齋)송선생전(宋先生傳)대작(代作) 송병선(宋秉璿) 1836 ~ 1905(헌종 2년 ~ 광무 9년), 호 연재(淵齋) 구한말의 학자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음독 자살한 순국지사. 동구 용운동의 문충사에 배향되어 있음 *구한말의 학자 송병선 선생의 가족과 행적을 작성한 글임 2.하민영환살신성인(賀閔泳煥殺身成仁) *민영환(閔泳煥/1861~1905) 한말의 문신·순국지사. 본관 여흥. 자 문약(文若). 호 계정(桂庭). 겸호(謙鎬)의 아들 3.추풍함가(秋風咸歌) 4.대야가(*夜歌) 5.단상요(斷*謠) 6.계명가(鷄鳴歌) 7.*자시향당* 8.훈자(訓子) 9.한여대이(旱餘大而) 10.축한위(逐旱魏) 11.두발형식불동설(頭髮形式不同說) 12.인지기량부동륜(人之器量不同倫) 13.정신수양보조방법(精神修養補助方法) 14.서호문답(西湖問答) 15.사유불가지자오(事有不可知者五) 16.합**강설(合**强說) 17.아국얼(我麯孼) 18.정신제(精神제) 19.논중앙신보정간(論中央新報停刊)代人作 *1905년을 전후한 신문내용 20.탄매국*(歎賣國*)代人作 *나라를 팔아먹는 자에 대한 탄식의 글 21.매매국*(罵賣國*) *나라를 팔아먹는 자에 대해 욕하는글 22.아원가(아願歌) *말못하는 이가 원하는 노래 23.기매일신보사장배설(寄每日申報社長裵說) *1904년부터 국권피탈 때까지 발간되었던 일간신문. 1904년 2월에 일어난 노일전쟁(露日戰爭)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이 양기탁(梁起鐸)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던 무렵은 일본측이 한국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사세(社勢)가 확장되고 독자수도 늘어나면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된 이후에는 민족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언론기관이 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版)  6페이지로서 그 중에서 2페이지가 한글전용이었고, 4페이지는 영문판이었다. 창간 다음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영문판과 국한문신문을 따로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간하였다. 영문판의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고, 창간 당시는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발간하였다. 그러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전용 신문의 필요성을 다시 느끼게 되어 1907년 5월 23일부터는 따로 한글판을 창간하여 대한매일신보사(社)는 국한문·한글·영문판 3종의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발행부수도 세 신문을 합쳐 1만 부를 넘어 당시로서는 최대의 신문이 되었다.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큰 영향력을 가진 신문이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자 일제는 이 신문에 대해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일본측은 외교경로를 통해 소송을 제기하여 발행인 배설은 1907년과 1908년 2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되었고, 양기탁도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배설은 이러한 탄압과 싸우는 가운데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萬咸:Alfred Marnham)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배설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고, 국권피탈이 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 24.기진흥회장(寄振興會長) 25.寄國民大演流會長宋秉畯(기국민대연유회장송병준) 26.長書于日本特波大使伊藤博文(장서우일본특파대사이등박문) 27.대십삼도유생장서우이등박문(代十三道儒生書于伊藤博文) 28.대대동유약소유생변명일진회선언서(代大東儒約所儒生辨明一進會宣言書) *일진회-1904년 일본이 고문정치만으로 한국정부를 간섭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친일적 민의(民意)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통역이던 송병준(宋秉畯)과 구(舊)독립협회의 윤시병(尹始炳) ·유학주(兪鶴柱) 등이 1904년 8월 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가 8월 20일 일진회로 고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여 발족하였다. 이 단체는 ① 왕실의 존중, ② 인민의 생명 및 재산 보호, ③ 시정(施政)의 개선, ④ 군정(軍政) ·재정(財政)의 정리 등 4대 강령을 내세우고 국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단발(斷髮)과 양복차림으로써 부일(附日)의 결심을 나타내게 하고 문명의 개화를 급격하게 서둘렀다. 처음에는 서울 지역만을 중심으로 하여 지방에는 그 세력을 뻗치지 못하였으나 지방세력으로서 동학당(東學黨)의 친일세력인 이용구(李容九)의 진보회(進步會)와 같은 해 12월 26일에 합동하여 13도총회장에 이용구, 평의원장(評議員長)에 송병준이 각각 취임하였다. 1905년 11월에 개최된 총회에서는 회장 이용구, 부회장 윤시병, 지방총장 송병준, 평의원장 홍긍섭(洪肯燮)을 선출하여 일본인 고문 모치츠키 류타로[望月龍太郞]와 함께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을 10여 일 앞두고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위임함으로써 국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복을 누릴 수 있다’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한편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인 1907년 5월 2일에는 정부탄핵문제(政府彈劾問題)를 제출하여 국채보상운동으로 야기된 모든 사태가 구한국 정부의 잘못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같은 해 7월 18일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양위하게 되고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은 일진회원들을 토살(討殺)시키고 일진회 지부 및 그 기관지인 국민신보사를 습격 파괴하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哈爾濱]에서 암살된 이후부터 일진회의 매국행위는 더욱 가열되어 국권피탈안을 순종에게 몇 번씩 상주하기도 했다. 이에 중추원 의장 김윤식(金允植) 등은 송병준 ·이용구 등의 처형을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진회는 1910년 8월 22일 조약이 체결된 후 9월 26일 친일적 소임을 다하고 해체되었다. 29.기서우황성신문사장장지연(寄書于皇城新聞社長張志淵) 30.상*부청금율사(上**府請禁律社) 31.상*부(上*府) 32.청원우통감부대작(請願于統監府代作) 33.순충건원소공극대작(殉忠建院所公亟代作) 34.시각사회동지(示各社會同志) 35.시청국봉근거*아한동지)示淸國奉斤居*我韓同志 36.자문생어환웅원시서사동지(字問生於患雄院示書社同志) 37.설천감흥시동지(雪天感興示同志) 38.춘설증동지(春說贈同志) 39.시해외각국*람*한동지(示海外各國*覽*韓同志) 40.시서사동지(示書社同志) 41.상학부(上學部) 42.청설학교대작(請設學校代作) 43.상최면암선생(上崔勉庵先生)선생시위의병대장(先生時爲義兵大將) *최익현-본관 경주(慶州). 자 찬겸(贊謙). 호 면암(勉庵). 경기도 포천(抱川)에서 출생하였다. 김기현(金琦鉉)·이항로(李恒老) 등의 문인(門人).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지방관·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자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反)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書院)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1895년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1898년(광무 2)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의정부 찬정(贊政)·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한 뒤 굶어죽었다. 44.기이찬정*승대작(寄李贊政*承代作) 45.고산림동지(告山林同志) 46.기각교회(奇各敎會) 47.법령불일논상법부(法令不一論上法部) 48.고산림은일(告山林隱逸) 49.기극우의국*항거류한국민회장(奇亟于義國*港居留韓國民會長) 50.기극우의국*항거류한국연웅동포(奇亟于義國*港居留韓國連雄同胞) 51.기매일신보사대작(奇每日申報社代作) 52.공극대작(公亟代作) 53.응제문(應製文) 특장령학대작(特槳嶺學代作) 54.사제김봉학문대작(賜祭金奉學文代作) *김봉학-의정부학부주사로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민영환등과 함께 자결함 55.제문(祭文) 곡이공한응(哭李公漢應)代人作 *이한응-주영공사로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민영환등과 함께 자결함 56.제민충정영환문(祭閔忠正泳煥文) *민영환(閔泳煥/1861~1905) 한말의 문신·순국지사. 본관 여흥. 자 문약(文若). 호 계정(桂庭). 겸호(謙鎬)의 아들. 명성 황후의 조카. 백부(伯父)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태호(泰鎬)에게 입양하였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그 뒤 정자(正字)·수찬 등을 거쳐 81년 동부승지(同副承旨), 82년 성균관대사 성으로 승진하였다. 그 해 생부 겸호가 임오군란으로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3년간 거상 (居喪)하였다.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세 차례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렸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일단 관계(官界)로 돌아와, 약관의 나이로 도승지·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한성우윤 (漢城右尹) 등을 지냈다. 1887년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88년, 89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93년 형조판서·한성 부윤을 지냈으며, 94년 내무부독판사(督辦事) 및 형조판서를 다시 역임하였다. 95년 주미전 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이듬해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 석하였는데, 이 때 일본·미국·영국 등지를 두루 거치면서 서구문명을 처음으로 접하였다. 귀국 후 의정부찬정(贊政)·군부대신을 지낸 다음, 97년(광무 1) 또다시 영국·독일·프랑 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겸직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이 때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즉위 60주년 축하식에도 참석하였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새 문 물에 일찍 눈을 떠,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 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상주하였다. 군제(軍制)의 개편만이 채택되어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다. 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 시정(時政)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민씨일파에게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후 다시 기용되어 참정대신(參政大臣) 등을 지내고,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친일적인 대신들과 대립, 일본의 내정간 섭을 성토하다가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의 한직(閑職)으로 밀려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 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백관(百官)을 인솔하여 대궐에 나아가 이를 반대하였다. 일 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 다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육의전)에 모여 상소를 논의 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본 뒤 조용히 자결하였다. 당대 제일의 권문세가 출신으로서, 현직(顯職)의 명예를 던지고 망국(亡國)의 슬픔을 죽음으 로써 달랬다. 의정대신(議政大臣)에 추증, 고종의 묘소에 배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중장(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57.제조충정병세문(祭趙忠正秉世文) *조병세-을사조약체결당시 특진관으로 있었으며 조약체결이후 자결함 58.곡연제송선생(哭淵齋宋先生) 59.곡면암최선생(哭勉庵崔先生) 60.곡안중근문(哭安重根文) 61.제전봉학문(祭全奉學文) *전봉학-을사조약체결당시 병정으로 있었으며 을사조약체결후 자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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