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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96년(元貞二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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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6년(元貞二年)간기가 있는 설암서첩(雪菴書帖)1책완질 이부광(李溥光) 요약정보 및 구매

1296년(元貞二年)간기가 있는 설암서첩(雪菴書帖)1책완질 이부광(李溥光)(元貞二年深秋雪菴書)

상품코드 1151908396
제조사 또는 연대 元貞二年深秋雪菴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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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6년(元貞二年)간기가 있는 설암서첩(雪菴書帖)1책완질 이부광(李溥光)(元貞二年深秋雪菴書)

상품 상세설명

원(元)나라의 이부광(李溥光)의 1296년(元貞二年)간기가 있는 설암서첩(雪菴書帖)1책완질 상태좋음 중간에 한장반이 떨어져 나가고 없음,뒷표지 없음 크기:30.7*19.5센치 보18상4 **간기는 元貞二年深秋雪菴書(1296년)으로 나와있어나 책의 간행연도는 1600년대 간행된것으로 보임 **설암의 대자 글씨에 관한 기록은 공민왕 때의 문신 李穡(1328~1396)의 『牧隱文稿』 권13 '書上扎補正雪菴大字卷後'에서 "문장은 漢이요, 시는 唐이요, 字書는 晉이고, 大字에는 雪菴을 으뜸으로 말한다. 설암의 스승은 누구인지 모르나 당 안진경 이래로 미치는 자 드물다. 이름이 어찌 헛되겠는가. 임금으로부터 배우지 않는 자 없이 모두 大字의 깊은 필법을 얻었다. 설암의 글씨는 독보적이었다."라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 이미 설암의 필적이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유득공의 『京都雜志』에 "'額體'라는 것은 설암의 글씨체이다. 서체가 題額에 적합하기 때문에 액체라고 하였다. 지금 설암이 쓴 「兵衛森帖」이 있다" 하여 '액체'라는 용어의 사용을 지적하였고, 『세종실록』 권52 세종 13년(1431) 6월 갑오조에는 "새로 간행한 설암의 법첩을 宗親∙議政府∙六曹∙代言司∙集賢殿 등의 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기부터 설암의 대자 글씨가 널리 유행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유행은 조선 후기에 이르도록 유행하여 궁실∙관아∙사찰∙서원 등의 편액과 주련에서 설암의 서법을 사용하였다. 설암의 서법의 사용을 살펴보면 고려 말 공민왕이 썼다는 강릉의 '臨瀛樓'도 설암체이고, 조선시대에도 대부분의 편액이 설암체로 쓰여 졌다. 조선 초기의 서화가 申檣(1382~1433)은 특히 편액 글씨에 뛰어났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에 "신장은 대자를 잘 썼다. 세종께서 예전에 설암이 쓴 韋應物의 「兵衛森畵戟宴寢凝淸香」이란 서첩을 얻었는데, '兵衛森' 세 글자가 떨어져나간 것을 신장에게 명하여 보충하게 하였다"는 기록은 설암체의 전문가가 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물 1019로 지정된 〈退溪先生書法〉은 퇴계 이황이 송대의 학자 소옹의 7언 율시 '龍門道中作'을 대자로 쓴 것으로, 이 대자 글씨는 雪菴의 서법이다. 그리고 '臨淵齋'는 이황의 제자인 배삼익(1534~88)의 서재 이름이다. 그의 아들 배용길(1556~1609)의 금역당과 사당 및 종가를 합쳐 '臨淵齋 桃木村'이라 부르는데, 안동댐 수몰로 인해 1973년 12월 현 위치로 옮겨졌다.(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호 지정) 종택에는 배삼익이 스승 이황으로부터 받은 '임연재'라는 대자서와 이를 모각한 편액이 함께 전한다. 이 대자는 이황의 다른 대자와 달리 起筆이나 收筆이 과장된 雪菴의 서풍을 강하게 보여 준다. 조선중기의 명필 石峯 韓濩(1543~1605)는 설암 서법으로『大字千字文』을 썼다. 이 서첩은 17세기 이후 편액과 주련, 비석의 전면에 사용되는 서체로 일반화가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18~19세기에는 『大字千字文』을 集字하여 육필위주의 설암 서풍이 유행하게 되었다. 대부분 비석의 전면은 이런 육필을 구사하였는데 특히 尤庵 宋時烈(1607~1689년)은 모든 금석문에 이런 서체를 구사하였다. 17세기 이후부터는 바위에 남아 있는 금석문이나 비석의 전면을 쓰는 서체로 대표적인 서체가 되었다. 한석봉의 『楷書千字文』도 설암을 본받은 『大字千字文』과 관계가 깊다. 『楷書千字文』의 서법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왕실에서는 선조를 비롯하여 元宗(1580~1619)∙仁祖(1595~1649)∙孝宗(1619~1659)∙顯宗(1641~1674)∙肅宗(1661~1720) 등의 왕들과 仁穆王后(1584~1632)∙貞明公主(1603~1685)∙義昌君(1589~1645)∙朗善君(1637~1693)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왕과 왕족들 사이에서 석봉 『해서천자문』을 교재로 학습하여 석봉체가 유행하게 되었으며, 왕실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추종하게 되었다. 특히 과거시험 준비과정에서 수반되는 습자에도 영향을 주었다. 愼獨齋 金集도 역시 이러한 반열에 있었던 사람으로 비석의 전면만은 석봉의 『해서천자문』과 같은 서체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설암체는 고려 말에 수용되어 조선 전 기간의 서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상과 같이 설암체는 조선전반에 걸쳐 영향을 준 대표적인 서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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