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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일(趙熙一),조희필(趙熙弼),조석우(曺錫雨)등의 간찰첩1책(1800년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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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일(趙熙一)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1869년(고종 6)에 대사성에 올랐고, 1870년 이조참의, 1874년 우부승지, 1881년 이조참판, 1882년 대사헌을 지냈다. 그뒤 1893년에는 식년감시의 이소(二所) 시관(試官)이 되어 과거를 관장하다가 한때 신지도(薪旨島)로 정배되기도 하였다. 1894년에는 공조판서가 되었고, 청일전쟁중에는 지중추원사로서 관서선유사(關西宣諭使)가 되어 전쟁피해가 심한 관서지방에 세제상의 감면과 군비확충 및 지방민을 안도하게 하는 공적을 세웠고 황해감사가 되었다. 그뒤 1898년 의정부참찬·중추원의관·장례원경(掌禮院卿)·궁내부특진관, 1899년 태의원경(太醫院卿), 1901년 목청전중건도감제조(穆淸殿重建都監提調) 등을 지냈다. *조희필(趙熙弼) *조석우(曺錫雨) 1810(순조 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용(稚用), 호는 연암(烟巖). 서울출생. 윤대(允大)의 손자로, 용진(龍振)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작(申綽)의 딸이다. 1835년(헌종 1)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852년(철종 3)이조참판에 올랐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지방을 다스리면서, 1854년 고조부 하망(夏望)의 문집인 《서주집 西州集》을 간행하였는데, 그 가운데 윤증(尹拯)에 대한 제문 속에서 송시열(宋時烈)을 비난한 글을 삭제한 것이 말썽을 빚어 유생의 줄기찬 항의로 파직당하여 중화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857년 석방되어 공조참판에 올랐으며, 그뒤 1867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글씨에 뛰어나 일가를 이룰 정도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성시영(成時永) *면로(勉老) **뒷면에 道山古堂(도산고당)큰글씨 와 관문서 납세필증서 6장등이 있는 간찰첩임 *상태아주좋으며 파장없음 *크기:37.5*26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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