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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외1층508상
**조병규(1846년~1931년)
1846년(헌종 12)∼1931년.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사익(士翼)이고, 호는 일산(一山)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고, 출신지는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산인면(山仁面)이다.
생육신 어계(漁溪) 조려(趙旅)의 후손으로, 부친 조성각(趙性覺)의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으로 조갑규(趙甲奎)‧조필규(趙必奎)가 있다.
조선 말기 기호남인(畿湖南人)의 종장(宗匠)으로 알려진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876년(고종 13) 식년시 생원과에 3등 10위로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관심을 가져 『사예요의(士禮要儀)』를 편찬하였다. 그 외 현실적인 경세론에도 밝아 「논균전(論均田)」‧「논적저(論積儲)」‧「논첨정(論簽丁)」‧「논차제(論車制)」를 지어 당시 식량비축과 교통문제‧세금부과 등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신독잠(愼獨箴)」과 「관선잠(觀善箴)」을 지어 좌우명으로 삼고 후진교육에 전념하였으며, 1898년 고향인 함안의 사립학교인 천명학교(闡明學校) 건립에도 기여하였다.
문집으로 『일산선생문집(一山先生文集)』 16권 9책이 전한다.
**노상직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노상직(盧相稷)[1855~1931]은 1855년 11월 21일 경상남도 김해군 생림면 금곡리에서 아버지 노필연과 어머니 성욱호의 딸 창녕성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소눌(小訥), 눌인(訥人), 자암병수(紫巖病叟)이다. 형은 대눌 노상익(盧相益)이다. 1871년 장수황씨와 혼인하여 1남을 두었고, 장수황씨 사후 진양하씨와 혼인하여 4남을 두었다.노상직은 1865년 김해부사 성재 허전의 제자가 되었다. 1882년 28세에 동당시에 입격하였다. 1883년 집안 재실인 창녕 국동의 추원재에서 하과를 개설하고 강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895년 밀양 금곡에 금산서당을 건립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1896년 밀양 노곡에 ‘자암초려’를 짓고 강학을 확대하였으며, 자암일록을 기록하였다. 1911년 12월 압록강 건너 서간도 안동현 흥륭가로 망명하였다. 대눌에게 입적한 아들 노식용을 잃은 후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쓰라는 대눌의 권고를 받아들여 1913년에 환국하였다. 이후 자암서당을 건립하여 강학을 재개하고 선현의 서책을 간행하였다. 1919년 독립 청원을 위하여 작성한 파리장서에 제자들과 함께 서명하였다가 옥고를 치렀다. 1923년 3월 창립한 밀양교육회의 고문으로 참여하였으며, 1925년 경남 유교협성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3월 24일 마산에서 7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부음을 듣고 각지에서 모인 제자가 1,000여 명에 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