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좋음
크기:20.5*31센치
보내1층21상2
**조선 전기 대구부사와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문관.
이현보(李賢輔)[1467~1555]의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자는 비중(菲仲), 호는 농암(聾巖) 또는 설빈옹(雪鬢翁)이다. 어릴 적 이름은 이유경(李有慶)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파(李坡)이고, 할아버지는 봉례 이효손(李孝孫)이다. 아버지는 현감 이흠(李欽)이고, 어머니는 호군 권겸(權謙)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부인은 권효성(權孝誠)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이고, 아들은 이석량(李碩樑)·이문량(李文樑)·이희량(李希樑)·이중량(李仲樑)·이계량(李季樑)·이숙량(李叔樑)이다
이현보는 1467년(세조 13)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1486년(성종 17)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1438~1504]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1498년(연산 4)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후 검열·봉교·전적·사서·정언을 역임하였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경상도 안기역(安奇驛)[현 안동시 안기동]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中宗) 즉위로 방면되어 다시 전적에 임명되었다. 1507년(중종 2)부터 호조좌랑·사헌부지평·예조좌랑·형조정랑을 지냈고, 1508년 이후로는 주로 지방관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508년 영천군수, 1514년 밀양도호부사, 1516년 충주목사, 1517년 안동부사, 1522년 성주목사를 지냈다.
이현보는 1526년 동부승지를 거쳐 1527년 4월 대구부사로 부임하였다. 대구부사 재임 시에 덕흥서숙(德興書塾)에서 예학(禮學)을 강론하며 대구부의 유학을 진흥시켰다. 1527년 영천(榮川)[현 영주시] 군수를 역임한 뒤에 부제학·우부승지가 되었고, 부모를 봉양하려고 1533년 경주부윤으로 내려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1535년 귀향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교유하였고, 11월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형조참판·호조참판을 거쳐 1541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임강사(臨江寺)에서 우거하다가 1555년(명종 10) 6월 사망하였다.
이현보는 저술로는 『농암집』 5권 2책이 있다. 「어부가(漁父歌)」, 「효빈가(效嚬歌)」, 「농암가(聾巖歌)」, 「생일가(生日歌)」 등을 지어 한문학사에 강호시조의 시인으로도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