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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1791년 목판본 윤선도(尹善道) 고산유고(孤山遺稿) 6권6책완질 > 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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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목판본 윤선도(尹善道) 고산유고(孤山遺稿) 6권6책완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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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사 1791년
원산지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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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1년(정조 15) 전라감사 서유린()이 왕의 명을 받고 간행하였다. 그 뒤 정조 22년 전라감사 서정수()가 윤선도의 본가에 간직된 목판본을 대본으로 하여 개편, 간행한 것이 오늘날 전하고 있는 ≪고산유고≫이다.

    이 책의 편목을 보면, 권1에는 오칠언()의 고시·율시·절구·회문()·집고() 등 250편이 실려 있고, 권2에는 <병진소 > 등 16편의 소()가 실려 있다. 권3의 상권에는 <국시소 >·<논예소 > 등 13편의 소와 <예설 > 2편이 있고, 하권에는 <상친정서()>를 비롯한 17편의 서()가 있다.

    권4에는 <답이현풍서 > 등 100편의 서가 수록되어 있다. 권5에서 <여갑산백서 > 등 21편의 서는 상권에 있다. 하권에는 13편의 축문, <향사당조약 > 1편, 4편의 서(), 2편의 설, 비명 5편, 잡저 5편, <산릉의 > 등 의() 12편, 잡록 3편, 기 2편이 실려 있다.

    권6은 별집으로 상권에는 시 8편, 부() 4편, 논 3편, 책() 6편, 표전() 4편이, 하권에는 ‘가사()’라는 표제 아래 75수의 시조가 실려 있다. <산중신곡 >·<산중속신곡 >·<고금영 >·<증반금 >·<초연곡 >·<파연곡 >·<어부사시사 >·<어부사여음 >·<몽천요 >·<견회요 >·<우후요 > 등이 하권에 수록된 시조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글 가운데 중요한 자료로는 <병진소>·<국시소> 등 시정()에 관한 상소문을 들 수 있다. <논예소()>·<예설> 등 예학에 관한 논의와 <산릉의> 등도 조선조의 정치사·사상사 및 당쟁에 관한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별집에 실려 있는 시조 또한 시가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병진소>는 1616년(광해군 8) 윤선도가 30세의 성균관 유생으로서 올린 글이다.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 옹립에 공을 세운 대북()의 영수 이이첨() 일파의 전횡과 이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한 영의정 박승종(), 왕후의 오빠 유희분()의 죄상을 낱낱이 들어 탄핵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문은 그 내용이 광해군에게 알려질 것을 두려워한 당시의 권신들에 의하여 감추어진 채, 그 보복으로 그의 아버지 유기()가 파직되고, 그는 이듬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견회요>와 <우후요>는 이때 지은 작품이다.

    조선조 예학논쟁의 발단이 된 윤선도의 <논예소>는 그가 73세 되는 1660년(현종 1)에 씌어졌다. 그 전해에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후()인 자의대비 조씨( )의 복()을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서인(西)의 영수 송시열()의 의견을 좇아 기년( : 1년상으로 복을 입는 것)으로 정하였다.

    이에 남인인 윤선도는 허목()·윤휴() 등과 함께 이에 반대하여 3년설을 주장하였다. 송시열 등은 효종이 둘째 왕자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들어 체이부정설( : 왕위의 계승이 윤리적 질서로는 정당하나 혈통상으로는 정당하지 못하다는 설)에 해당하므로 기년복이 합당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윤선도는 종통()의 정당함을 내세워 3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세자였던 소현세자()가 죽은 뒤 부왕 생전에 효종이 다시 세자로 책립되어 왕위에 올랐으므로, 둘째 왕자라고는 하지만, 적장자()와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 왕위에 오른 현종이 기년설을 따랐으므로 남인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논예소>는 불살라지고, 윤선도는 함경도 삼수로 유배를 당하였다.

    <국시소>는 윤선도가 71세 때인 1658년(효종 9) 동부승지로 있을 때 올린 글이다. 이 글에서는 본래 서인이었다가 남인이 된 정개청()의 서원을 철폐하고자 하는 송시열 등 서인의 의도가 부당함을 지적하였으나, 오히려 삼사()의 탄핵으로 삭직되었다.

    <산릉의>는 72세 때인 1659년 효종이 죽은 직후 좌의정 심지원()의 요청에 의하여 산릉()을 살펴 그 적부를 논한 글이다.

    본래 효종의 산릉은 수원()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일부에서 건원릉()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는 의론이 돌아 그 적부를 윤선도에게 판별하도록 하였다. 윤선도는 수원에 쓸 것을 주장하였으나 서인들의 반대로 묵살되고 건원릉 자리로 결정되었다.

    <산중신곡>·<산중속신곡> 등은 윤선도가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임금이 탄 수레를 좇는 것)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영덕에서 2년간의 유배를 마친 뒤, 고향인 전라도 해남의 금쇄동()에 은거할 당시 지은 작품이다.

    이후 윤선도는 예송() 후의 유배지로부터 1667년(현종 8) 풀려나게 되었다. 그 뒤 병자호란 당시 발견하였던 보길도()의 부용동()에 들어가 낙서재()를 짓고 은거하였다.

    그 때에 지은 것이 만년의 절창 <어부사시사>이다. 정치적으로 불우하였던 윤선도는 벼슬길에서 벗어나 짐짓 어부의 생활을 하였고, 그 결과로 남겨진 많은 작품이 ≪고산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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