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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이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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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옛날물건 댓글 0건 조회 490회 작성일 18-04-19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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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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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년도 : 1897.09.21 

출생지 : 충남 공주 


향토적 풍정(風淸), 그 평생의 화의 (畵意)와 사랑


이구열/미술평론가


특출하고 위대한 예술가의 생애는 대개 그것을 가능케 한 조건과 행운의 배경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한 말은 비단 예술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적 성공인 에게는 결국 타고난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게 해 준 행운과 조건의 배경이 있었던 것이고, 또 그 성공을 남다른 노력과 투쟁으로 성취하려고 한 본인의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존경받는 전통화가인 청전 이상범의 위대한 화필 생애도 그런 것이었다. 1897년에 시골 벽지의 농촌이던 충남 공주군 정안면 석송리 마을에서 태어난 그가 5남매의 막내로 홀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서울로 올라와 간구한 성장을 하면서도 신교육과 화가의 길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려움 속의행운이었고, 화가로서의 성공을 가능케 한 조건이 따른 것이었다.

전주 이씨 덕천군파의 후손으로, 아버지 이승원(李承遠)은 평해군수 철원현감, 공주영장(營將) 등의 벼슬을 지내고 있었으나 상범이 태어난 지 6개월 되던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어머니가 홀로 어린 남매들의 장래를 맡아 돌봐야 했던 처지에서 대담하게 서울로의 탈출을 결행했던 것이다. 그 강릉 김씨의 새 시대를 직시한 용기와 자녀 교육을 위한 서울로의 이주 용단이 없었던들 이상범의 빛나는 예술생애는 싹틀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부터 몹시 병약하여 여러 번 생사의 고비를 넘겼던 상범이 건강을 회복하여 어머니와 형들을 따라 고향을 떠난 것은 열살 때인 1906년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가산을 정리한 돈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서울에 정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리라. 그런 중에도 그 어머니는 아들들을 모두 신식교육의 학교에 보내는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해냈다. 그리하여 일찍이 구한국의 무관을 지낸 큰아들 상덕(象寡) 외에 둘째 상우(象禹)는 뒤에 토목기사가 되었고, 셋째 상무(象武)는 보성 고등 보통학교를 거쳐 교사생활을 하다가 금광에 손을 대어 해방 전까지 큰 부자로 살았다. 

막내아들인 상범도 셋방살이 전전 속에 한문 글방을 거쳐 1910년에는 사립 보흥학교에 입학해 2년을 다닌 후 사립 계동학교에 편입하여 1914년에 4년 과정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 시기에 상범은 남다른 그림 재능을 나타냈다 교과서를 못사고 백노지를 잘라 묶은 공책에 친구의 교과서를 빌려 내용을 베껴 쓰면서 삽화까지도 정확히 옮겨 그리는 천부성을 보였다.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 진학이 어려웠던 처지에서 상범이 학비를 받지 않은 YMCA 학관 중학부에 들어갔다가, 역시 무료로 글씨와 그림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서화미술회 강습소의 존재를 알고 달려간 것은 화가의 길로 이끈 행운의 손짓에 따른 것이었다.

1910년 한일합병 직후 민족사회 각계에서는 국망의 한을 씹으며 모든 분야에서의 새로운 민족역량 배양과 역사적 문화전통의 계승을 다짐한 여러 성격의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서화계 발전을 위한 신진 서화가 양성 목표의 서화미술회가 결성되어 서과(書科), 화과(畵科) 전문별로 각각 3년 교육과정의 강습소를 만들고 서화에 재질이 있는 청소년 학생을 입학시키기 시작한 것은 1911년의 일이었다. 그 강습소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미술학교 성격이었다. 그 서화미술회 강습소의 중심적인 선생은 당시 전통화단의 쌍벽 대가로 칭송 받던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이었다. 산수, 인물, 화조 등 모든 화제를 수묵화와 세필 채색화 기법으로 자재롭게 그렸던 그 두 선생은 19세기의 대표적 거장인 장승업에게 직접, 간접으로 배우고 영향을 받은 후배였던 점에서 조선시대 회화 전통의 맥을 정통으로 계승한 존재였다. 따라서 그들 밑에서 그림을 공부하게 된 이상범을 비롯한 서화미술회 강습소 출신들도 모두 조선시대의 화백을 정통으로 뒤이은 셈이었다.


안중식과 조석진의 제자로 서화미술회 졸업


이상범이 서화미술회 강습소 화과에 들어간 것은 수시 입학이 가능했던 1914년 연말게 였던 것 같다. 그 이듬해 봄에 입학한 노수현, 최우석과 동기생이 되어 1918년 4월에 정식으로 졸업했기 때문이다. 강습소로서는 4기생 배출이었다.

이들의 선배로는 1기생으로 이용우, 오일영, 2기생으로 김은호, 3기생으로 박승무가 있었다. 이들은 강습소에서 모든 정통화법을 충실히 배웠지만 그런 가운데 안중식 선생은 특히 그 제자들에게 현실풍경과 꽃, 새, 동물 등의 직접적인 사생 훈련을 쌓도록 지도했다고 한다.

그러한 시대적 가르침은 안중식 자신이 일찍이 1900년부터 1902년까지 일본에 건너가 있을 때 동경과 경도 화단을 근대적으로 활기 있게 하던 현실적 사실주의 태도의 새로운 움직임을 목격하고 이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안중식은 1915년에 경복궁과 광화문을 주제 삼은 두 점의 <백악춘효(白岳春曉)>와 호남의 <영광(靈光)풍경> 등의 역작을 사실적인 실경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안중식은 조석진에 비해 확실하게 근대적 사실주의를 선도한 전환기의 대가였다.

1915년은 지난 날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이미 묵화를 배운 바 있는 고희동이 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하여 서양화를 전공하고 돌아온 해였다. 고희동은 그 유학 중에도 방학 같은 때에는 수시로 두 선생을 찾아뵈며 일본의 신미술 동향 등을 알려주곤 했었다. 역시 그 전에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그림을 배운 이한복이 1918년 봄에 동경미술학교 일본화과에 입학한 일도 1910년대 서울 서화계의 시대적 변동 움직임을 자극한 배경이었다.

그 변동의 가장 획기적인 것은 1918년 6월에 역시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가 단체인 서화협회가 안중식을 초대 회장으로 추대하며 결성된 일이었다. 그 때 이상범을 비롯한 서화미술회 출신 신진 화가들도 모두 정 회원으로 가입하여 다같이 신미술 시대를 열게 되었다. 서화협회 결성 취지서에도 "신구 서화계의 발전, 동서 미술의 연구"가 목표(제2조)로 밝혀져 있다.

그러나 1922년 무렵까지도 이상범의 그림은 사풍(師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19년 "청전" 호의 낙관으로 그려진 <유마(柳馬)>(도판1)와 그 이전에 "산농 (池 )" 이란 초호(初號)를 쓴 (추경산수)(도판2)등은 조석진과 안중식의 필법을 충직하게 따른 것임을 명백히 보여 준다. 그리고 1920년에는 화재로 크게 손상돼 있던 창덕궁의 대조전, 희정당, 경훈각의 복원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이상범과 노수현에게는 경훈각 안의 동서 벽면 장식화 대작으로 <삼선관파(三仙觀波, 서벽)>(참고도판 1)와 <조일 선관도(朝日仙觀圖)>를 제작할 기회가 주어졌다. 섬세하고 치밀한 전통적 장식화 기법으로 그려진 그 벽화는 이상범과 노수현의 젊은 역량이 결정적으로 평가된 놀라운 역작이었다 지금도 매우 좋은 보존상태로 경훈각에서 볼 수 있다.


향토적 실경주의 추구


1920년 4월에 창간된 일간 민족지 동아일보에 당시 동경에 가 있던 신문학의 청년시인 변영로가 1919년의 안중식 타계에 뒤이은 조석진의 부음을 듣고 「동양화론」을 기고하였는데, 거기서 강조한 "시대정신" 의 새로운 회화 창조 촉구를 이상범과 그의 젊은 동료 화가들이 읽고 얼마나 자극을 받았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것을 읽었을 것이고, 그에 대한 토론도 하려고 했을 것이다. 일간신문의 사회적 보급이 급속히 넓혀지던 1920년대의 개막은 그 지면에 새로운 시대적 미술정보가 자주 소개되며 신세대 화가와 미술학도들에게 종래적 가치관에서 벗어난 새로운 생각을 하게 유도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동경미술학교 출신의 신미술 유화가였던 고희동이 총무로서 실질적으로 이끌던 서화협회가 1921년 4월에 제1회 회원작품 전람회인 서화협회전을 열 때, 그 전시장에는 이상범을 비롯한 신진 세대들의 전통적인 수묵화와 채색화 외에 고희동과 나혜석이 출품한 유화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1936년까지 15회를 기록한 이 서화협회의 연례전은 1922년부터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문화정책으로 꾸미기 시작한 최대 규모의 신인작품 공모 심사 및 시상제도인 자극적인 조선미술전람회가 해마다 도록을 간행한 것과는 달리 빈약한 재정사정으로 도록을 남기지 못해 전시 작품의 구체적 내면을 알 수가 없는 실정이다. 그 대신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의 모든 입선, 특선, 수상작 도판들이 비록 흑백이지만 같은 시기에 서화협회 전에도 출품했던 화가들의 작품 수법을 아울러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도움을 준다.

이상범은 첫 조선미술전람회부터 출품한 뒤 1944년의 그 마지막 전람회까지 계속 참가하며 두드러지게 각광을 받았고 화가로서의 사회적 성공을 확실하게 성취할 수 있었다 그는 체질적인 시골 애착의 심사로 그 현실적 풍정과 가난한 삶의 환경을 정감 짙게 주제 삼으려고 한 일관된 창작성으로 그러한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1923년 3월의 제3회 서화협회전에 출품했던 첫 시도의 현실적 시골풍경의 수묵화 <해진 뒤>에 대해 동아일보가 이미 다음과 같이 논평했을 만큼 각별한 주목과 평가의 과정을 쌓고 있었다.


(이번 서화협회 전에서) 가장 새로운 색채를 나타낸 작품은 동연사(同硏社) 동인의 것이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이상범의 <해진 뒤>와 같은 것은 종래 우리 화단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작풍으로. 추상적 기분을 버리고 사생적 작풍을 동양화에 응용한 점은 화단에 새로운 운동이 있은 후 첫 솜씨로 볼 수가 있다.


동연사란 1923년 초에 이상범, 노수현, 이용우. 변관식이 중국 화풍 탈피와 일본화풍 배격의 새로운 "우리 조선화" 태도와 방향을 연구 및 시도하자고 다짐하며 결성한 모임이었다. 그 동인들의 의지가 반영된 현실 시각과 체험적 향토 풍경의 사실적 수묵화들이 서화협회전에 처음 발표되어 앞서와 같은 신문의 찬사와 민족 사회의 큰 반응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 달 후에 열린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는 이상범이 말년까지도 즐겨 붙이려고 한 <모연(暮煙)>이란 명제의 시골 농촌풍경 작품이 출품되고 있었다. 그 후 일관되게 추구된 이상범의 시골풍경 주제와 수법적 발전의 내면은 당시 조선미술전 도록에서 살펴 볼 수 있다. 그 시대의 헐벗은 산과 궁핍한 농토, 쓸쓸한 농가와 가난한 농부의 점경, 그 밖에 산사(山寺)의 존재 등을 소재 삼은 모두가 적막한 풍경화들이었던 <모아한연(暮鴉寒煙)>(참고도판 2), <소슬(蕭瑟)>, <초동(初冬)>, <우후(雨後)>, <소사(蕭寺)>, <한우(寒雨)>, <잔추(殘秋)>, <만추(晩秋)>, <초설(初雪)>, <귀로(歸路)>등이 1930년까지 조선 미술전에 해마다 출품되어 입선, 수상, 특선을 거듭한 작품이었다. 그 화면들의 현실감과 현장감은 현지 사생 또는 스케치 외에 체험적인 상상으로 전개시킨 것이었으나, 때로는 적절한 사진을 이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유현한 수묵화 필법의 독자성


조선미술전에서의 이상범의 두각은 1926년까지 연이은 입선, 1925년의 수상, 1927년부터 34년까지의 8회 연속 특선 기록에 이은 추천작가(1935), 참여작가(1938) 위치 도달의 과정이 명백히 말해준다. 일제의 종국적인 패망 직전인 1944년까지 존속된 조선미술전에 해마다 참가한 이상범의 1930년대 이후 작품들도 향토적 주제성과 소재면 에서는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었다. 다만 시골의 산야와 농가 및 그 삶의 환경이 전보다 한결 넓은 시야로 전개되고, 수묵필치의 밀도와 구도의 세련성 등이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발전적 변화를 나타냈을 따름이다. 먼 산이나 가까운 언덕 밑으로 흐르는 아침안개 또는 저녁안개의 정취 표현이 이상범의 화취(畵趣)로 전형 화되기 시작한 것도 1930년대부터였다. 그 시기의 작품 명제도 전과 다를 바 없는 취향으로 붙여지고 있다. 곧 <촌로(村路)>, <귀초(歸樵)>, <수토( 土)>, <황원(荒原)>, <모운(暮韻)>(참고도판 3), <무림(霧林)>, <고원효색(高原曉色)> 등이었다. 향토사랑의 심의(心意)가 한없이 내재되어 있는 그 화면들은 1950년대 이후 궁극적으로 심화 및 전형 화되는 심정적 야취(野趣)지향의 독자적 화필 경지에 앞선 과정의 향토주의 집착이었다.

한편, 이상범은 생활을 위해 1927년에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소설 삽화와 사진 수정 등을 맡고 있다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선수로 우승한 손기정의 사진 보도 과정에서 러닝 셔츠 가슴 부분의 일렬국기를 흰색으로 지워버린 항일사건의 당사자로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고통을 겪고 퇴직을 강요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 사이 1932년에 이충무공 유적 보존회와 동아일보사가 민족적으로 성금을 모아 충남 아산의 현충사를 중건할 때에 이상범은 이순신 장군의 무인상(武人像) 영정을 제작하여 봉안케 하였다. 

이상범이 청전화숙(靑田畵塾)을 꾸미고 문하생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의 일로, 누하동의 작은 집 사랑채에서였다. 배렴, 정종여, 이현옥 등이 그 화숙에서 수학하였다. 이 제자들은 스승의 향토주의 작풍과 수묵화 필법에 영향을 받은 작품들로 조선미술전등에 진출함으로써 이상범의 화맥을 형성시켰다.

1940년에 서울의 유력한 화상이었던 오봉빈이 운영한 조선미술관이 개관 10주년을 기념하여 전통화단의 대표적인 10명가(名家)의 산수풍경화전을 조직할 때에 이상범도 포함되었다. 그때 그가 초대 출품한 작품은 <우후(雨後)> 등이었다.

1945년 광복 이전에 이상범이 서화협회전, 조선미술전, 그 밖에 10명가 산수풍경화전 등에 성실하게 그려냈던 작품들 중에서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인 1926년 작 <초동>(도판5)과 1930년 작 <잔추>(도판6)만이 겨우 전해질뿐인 것은 작가를 위해서나 근대 한국미술사의 견지에서도 애석한 일이다. 그만큼 이상범의 청년 시기와 중년 시기의 작품 업적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1941년을 전후한 때에 이상범을 논평한 몇몇 전문적인 평문은 앞서와 같은 작품의 상실을 역사적으로 보완해 주고 있다.


나는 청전만큼 자기의 세계를 순수하게 개척한 사람이 없다는 데 찬사를 불석(不惜)한다. 평원한 취재(取材)로부터 고갈(枯渴)한 점획과 유현한 발묵법(潑墨法)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청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 김용준. 「청전 이상범론」.『문장』. 1939


청전의 기법은 수묵의 선미(禪味)에서 체득한 것이며, 남화적인 기운이 높은 경지에서 소요할 줄 아는 용묵(用墨)의 인(人)이다. 그 유현한 공간에는 향토적인 정서가 표류한다


- 윤희순.「22회 조선미술전람회평」.1943


앞의 인용문에서 지적되고 있는 유현한 발묵미의 독자성과 향토적 정서의 표류가 충만하는 이상범의 화면세계는 1940년대 후반부터 더욱 전형 화되고 주제요소의 정취도 갈수록 상상력으로 심화되어 갔다 그러한 작풍의 변화는 1950년대 후반부터 필의(筆意)의 원숙을 뚜렷하게 나타냈고, 1960년대에 접어 들면서는 이상범 예술의 참다운 감명의 절정을 보게 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6년에 그려진 대작이자 역작인 <모운>(도판16)은 앞에 말한 변화 초기의 대표작이다. 1944년의 <고원효색(高原曉色)>에 뒤이어 제작된 이 작품은 멀리 높고 낮은 산들이 광대한 시야로 첩첩이 전개되고, 그 골짜기마다 저녁안개가 짙게 깔리고 있는 시골의 정취를 주제 삼고 있는데, 근경의 황량한 바 위산과 언덕 너머로는 소를 앞세우고 가는 농부의 존재가 도입되어 있다. 화면 전체에 어두워진 저녁 시각의 물씬한 향토 냄새와 먹빛의 깊은 농담의 조화가 충만한 작품이다.

앞의 <모운>을 포함하여 1940년대의 작품들에서 주목되는 새로운 기법적 요소는 금강산 실경 같은 바위산이나 시골의 야산 또는 언덕의 암벽 표현을 견고한 실재감으로 강조하려고 한 농묵 필치이다. 이 수법도 그 뒤로 이상범의 독특한 필법으로 정형화된다. 그런가 하면, 수목과 갈대 숲 또는 풀숲의 수법 등도 모두가 완연한 독자성을 이루게 된다.


절정의 화의와 필의 , 야취의 시골풍경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 다음해에 제1회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 (약칭:국전)가 개최될 때에 이상범은 추천작가로 추대되어 참가했고, 그 후 1968년까지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으로 계속 출품하며 전통화단의 원로 대가로서의 예술정신과 작품의 독창적 경지를 보여 주었다. 1949년에는 홍익대학 미술학부 교수로 취임하여 1961년에 정년 퇴임할 때까지 동양화과 학생들에게 전통적 수묵화 기법과 그 정신을 지도하였다.

불의의 6 25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국전이 휴전 직후부터 해마다 열리며, 그 때마다 이상범의 역작도 진열되어 주목을 받았다. 이 국전 출품작들은 1950년대 이후의 이상범 예술의 절정 도달과 심화를 단계적으로 말해 주는 역작들이다. 국가적인 전람회에 내놓기 위해 마음먹고 그린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고원(高原)>, <설원(雪原)>, <무림조애(霧林朝靄)>, <황원>, <영막모연(嶺幕暮煙)>, <고성모추(古城暮秋)>, <유경(幽景)>등이 1960년 9회 국전까지의 출품작 명제이다. 이는 전날의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명제 및 그 작품 취향의 지속적 지향이자 일관된 추구였다 앞의 명제들의 일관성은 그림을 보지 않고도 능히 알 수 있을 만큼 작가의 끊임없는 향토애의 심의와 시각을 선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병환으로 1968년의 17회 국전까지만 출품한 작품들도 <산음촌가(山蔭村家)>. <영막(嶺幕)>, <설촌(雪村)>(참고도판 4), <효원(曉原)>, <무림효색(茂林曉色)>, <고원무림(高原霧林)> 등으로 이어졌다. 이상범 자신이 그렇게 한문 용어로 제목을 붙인 것이어서, 명제 취향도 그렇게 성격적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국전을 비롯한 전람회 출품작이 아닌 어떤 특별 주문제작이나 별도의 작품들에도 확실한 명제가 없다면 작가가 즐긴 용어의 명제를 붙이는 것이 마땅하다.

이상범은 봄, 여름, 가을, 겨울 풍정의 <사계(四季)> 연작도 위촉이나 주문에 따라 크게 혹은 화첩으로 그리기도 했으나 단 폭의 작품으로는 쓸쓸한 가을철과 적막한 설경을 주로 그렸다. 물론 녹음이 우거진 여름풍경도 많이 그리긴 했으나 봄 풍경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모두 작가의 심사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풍경도 적막한 산촌이나 외딴 초가집 그리고 집밖의 농부와 소의 움직임 등이 벽지 산골의 삶의 모습으로 화면의 초점이 되었고, 그 주위의 계절적 자연환경의 정취는 부차적인 배경으로 구성되게 했다. 계절을 불문한 대다수의 작품에 도입된 구도상의 중요한 시점인 계류의 방향, 속도감과 물소리의 느낌 그리고 강물 위의 고기잡이배와 그 정서 등도 모두 이상범의 시골 풍경의 전형적인 구성요소이다. 먼 산언덕 위로 고성 (古城) 석벽과 오랜 문루(門樓)가 나타나게 하는 작품도 있다. 그것은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등의 현지에서 스케치하기도 한 시각적 체험과 역사의 증정을 시골의 정겨운 삶의 환경으로 그리려고 한 것이었다.

그토록 평생을 시골과 산골의 마을과 외딴 집과 착한 농부의 삶을 생각하고 상상하며, 그것을 평범한 야산과 숲과 계류와 냇물. 그 밖에 산사와 고성과 주막 등의 존재와 조화시켜 그리려고 한 이상범의 마음은 그러한 시골 태생의 생래적인 것이었다. 그는 수려하거나 웅장한 산은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야취를 무한히 사랑했고, 또한 그것을 마음으로 끝없이 즐기려고 했다.

그 야취는 특별히 계절과 관계없이 새벽, 한낮, 저녁의 시간대로 그려지면서 각기의 분위기로 표현되곤 했다. 곧, 야산과 숲이 자잘한 수묵 점선과 암질(岩質)의 농묵 처리로 형상된 위로 청묵(靑墨)이나 등황색을 우려내어 은근한 전면적 색조를 발현시켰다.

이상범의 그 독자적 화필세계에 대해 구도의 유사성과 주제요소의 반복성 등을 들어 비판하려고 한 일부의 시각이 1930년대부터 이미 있어 왔지만, 그의 작품 하나 하나에 함축되어 있는 표현적 감흥과 필치의 예술적 충실성 그리고 뚜렷한 개성적 창작성등은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필은 감동을 주었으며, 순수하게 평가되어 왔다.

올해로 탄생 1백주년이 되는 청전 이상범은 분명히 20세기 한국화의 위대한 창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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