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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이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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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옛날물건 댓글 0건 조회 278회 작성일 18-04-19 01:09

본문

이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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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년도 : 1901.11.04 

출생지 : 


「桂惠李方子女史遺作展」에 부쳐‥‥


흔히 "비운(悲運)의 왕비(王妃)"로 불리는 가혜(佳惠) 이방자(李方子)여사가 타계한지도 벌써 5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李여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어디에선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사회사업 활동에 진력하고 있는 듯이 느껴질 것이다. 그것은 왜일까. 결코 크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李여사의 행적이야말로 뜻 있고, 돈 있다고 해서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까닭이다.


무엇보다도 농아 · 소아마비 등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냉대받는 신체장애 청소년들에게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데 헌신했다는 점에서 李여사의 존재감을 더욱 크게 느끼는지 모른다. 우리와 함께 할 때는 그 존재감의 크기를 느끼지 못하다가 곁을 떠나 유명을 달리하고서야 비로소 존재의 체적을 깨닫는 것이 우리 인간의 일상사가 아니던가. 李方子여사는 격변하는 근 현대사의 주인공이자 열외자 였다는 사실로써 이미 그토록 험난했던 생애를 쉽사리 어림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 가슴속에 자리한 李여사의 이미지는 이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밝히는 횃불과 같다고나 할까.

일제 36년과 6.25로 이어지는 참혹한 세월을 지나오며 세끼 끼니에 대한 걱정을 놓기도 전인 1960년대 중반에 이미 신체장애자들을 위한 복지사업에 나선 李여사의 헌신적인 삶은 그 부피를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위안임과 동시에, 감동이며, 감사가 아닐 수 없다. 李여사가 사회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물질적인 지원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손수 칠보제품을 만들어 금을 마련했다는 대목에서 그 뜻은 더욱 빛난다. 그처럼 분주한 생활 속에서도 서예·수예·화가(和歌 : 日本式의 詩調), 그림 등의 예도(藝道)로써 정신세계를 고양시키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물론 예도에서 얻어진 작품들 또한 복지사업에 여러모로 보탬이 될 수 있었다. 李여사는 예도는 어디까지나 자기수양및 정신적인 깊이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하였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李여사의 서예와 그림을 그러한 입장을 잘 나타내고 있다.

결코 전문가적인 식견이나 기술을 과시하지 않으면서 소박하고 담담한 필치로 스스로의 심회를 토로하는 것이다. 정결하면서도 명료하고 순수한 붓자국이 지어내는 글씨와 그림의 표정은 맑기만 하다. 기교를 다하지 않는 가운데 찬찬히 전개되는 운필의 맛은 속기(俗氣)가 들어서지 못하는 내적인 힘을 내포한다.

그래서일까, 李여사의 글씨와 그림은 화사한 멋은 덜하다. 어느 구석에서도 자기 표현성, 즉 자기과시를 느낄 수 없다. 가능한 한 가필하지 않는 일회적인 운필로써 시종한다. 작품에 따라서는 적묵·발묵법이 쓰이기도 하지만 문인화로서의 그의 작품은 담백한 표현을 중시하므로 기교적인 수식(修殖)을 지양하는 것이다.

어쩌면 일본 황족의 왕녀(王女)로 태어나 구한말이라는 격랑기의 제28대 영친왕(英親王)의 왕비가 정으로써 겪어야 했던 영욕을 가슴속에 묻는 행위로서의 결과가 글씨와 그림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글씨와 그림등 李여사의 예도는 번잡한 세상사와 상시 격리되어 진실한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자 공간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세속과 절연된 구중 궁궐속과 같은 황족생활을 통해 곱디곱게 꾸며져온 李여사의 생활규범 및 정신세계는, 몰락한 한 나라의 왕비로서의 자존을 지탱케 하면서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을 따뜻하게 밝혀주는 횃불로 전화(轉化) 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李여사의 예도(藝道) 또한 그러한 삶의 궤적일 산물임을 말할 나위도 없다. 李여사의 글씨와 그림을 보노라면 티없이 살다간 한 인간의 투명한 의식세계가 손에 잡힐 듯하다. 도무지 꾸밈이라곤 없는 맑디맑은 심성이 빚어낸 의식의 그림자임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산수에서부터 화훼·영모·사군자·화조 등에 이르기까지 군더더기 없이 그려가는 담백한 운필은 우리의 마음을 맑게 비워낸다.

세속적인 일체의 욕심으로부터 떠난, 담담하면서도 진실한 표현언어이기에 우리의 감정에 쉽게 젖어드는 것이다. 어찌 보면 기교를 너무 등한시했다 싶으리 만치 소박한 필법이야말로 李여사의 글씨와 그림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이당(李堂) 김은호(金殷鎬)와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에게서 화조를 배웠고, 철농(鐵農) 이기우(李基雨)로부터 서예를 익혔는 바, 전문가적인 욕심을 낼 법도 한데 끝내 아마추어로서의 입장을 고수했다.

역시 정신적인 고양및 자기수양의 방법으로 국한시킨 것은 李여사다운 면이기도 하다. 이미 세속적인 영화(榮華)에 연연하지 않는 초연한 삶의 태도로써 스스로를 지켜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李여사였기에 예도 또한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과 글씨는 인격의 반영이라고 한다. 문인화 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림과 글씨 자체보다는 그를 이끄는 정신적인 깊이를 중심에 놓았다.

한 인간의 삶의 방식은 인격을 키우는 요체이다. 따라서 글씨와 그림이 인격의 반영이라면, 이를 통해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해 볼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李여사의 글씨와 그림이 중히 여겨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李여사는 일국의 왕녀로서 또한, 일국의 왕비로서 그리고 그러한 체통이 어울리는 삶의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이상적인 인격미를 글씨와 그림속에 투사시킬 수 있었다. 李여사의 글씨와 그림은 문인화의 요건을 충족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고결한 정신성으로 채웠기 때문이다. 삶의 자태가 고상하였고, 생각 또한 고매하였으니 글씨와 그림이 거기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세간의 일에 현혹되지 않고 묵묵히 스스로를 태우는 데 헌신한 李여사의 실천행은 불법(佛法)에 귀의한 불도로서의 입장을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李여사는 그러한 사실까지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李여사의 한국에서의 삶은 복지사업이라는 뚜렷한 목적으로서 구원되었던 것이다.

李여사가 1963년 12월 82일 한국 국적회복과 함께 환국하기 앞서 「한국인이면서도 일본의 티를 받을 나에게는, 나하나 일지라도 마음속에 갖고 있는 죄갚음을 조금이라도 갚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사람의 국민으로서,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한국사회가 조금이나마 밝게, 한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구제되도록 바라면서 조그만 돌을 하나씩 쌓듯이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는 자기고백으로써 한국에서의 삶의 목표를 정했다.

이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李여사의 삶은 일본제국이 저지른 죄과를 혼자서라도 조금이나마 갚겠다는 자기회생 정신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李여사 자신의 삶은 항상 무거운 짐을 진 느낌의 연속이었으리라. 李여사 자신이 대 일본공영의 헛된 꿈의 회생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죄업으로. 자처한 것은 대승(大乘)의 정신으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비록 몰락한 이왕가(李王家)의 마지막 왕비였을지라도 일국의 국모로서의 책임을 외면할 수 없다는 자기확인을 통해 자존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일본제국 제1급 황족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모리마사오오 (守正王)의 제1왕녀로 태어난 마사꼬(方子)여사는 당시 황실 최고의 미인으로 꼽힌 어머니 이쓰꼬(伊都子)를 닮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귀족들의 자녀만이 다니는 학습원에서 공부하며 틈틈이 수예, 서도, 피아노, 화가(和歌)를 익힘으로써 여자로서 그리고 왕녀로서의 교양을 쌓아갔다. 아버지 모리마사오왕은 다이쇼오천왕(大正天皇)의 넷째 왕자로 태어나 군인의 길로 들어선 뒤 여단장, 사단장 등을 거쳐 패망 직전에는 [원수로서 고오다이징구우(皇大神宮)의 재주와 대일본 무덕회총재 (武德公總裁)라는 황족으로서의 명목상 지위」에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전 사가한슈(佑架漢主 : 제후) 나베시마 나오히로후작(候爵)의 둘째딸로서 황족중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이 같은 황족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한 李여사는 적령기에 들어 황태자(裕仁天皇)의 비(妃)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뜻하지 않게 일선일체 (日鮮一 )라는 일본제국의 정치적 음모로 말미암아 볼모로 잡혀온 대한제국의 이은(李垠)왕세자와 결혼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지배국가와 피 지배국가의 왕녀 왕자가 결혼하는 사실 자체가 비극의 시발점이었음은 필연적인 일이다. 정혼한 뒤 결혼날짜를 불과 나흘을 앞둔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승하한 것을 시작으로 첫째 왕자 진(晋)의 죽음, 1924년 관동 대지진후 조선인대학살사건, 2차대전 패전으로 인한 일본제국의 패망과 그로 인한 신적강하 (臣籍降下 : 황족에서 평민으로 신분격하), 아버지 모리마사오왕의 전범재판 회부, 6·25동란 등 감당하기 어려운 역사적 질곡을 헤쳐온 李여사의 운명은 한마디로 불운하다기보다는 가혹한 것이었다.

침략국 일본제국의 황족이었다는 점에 앞서 몰락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비였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일개 평범한 평민이었다거나 아니면 일본제국의 황족으로서 남아있었더라면 李여사에게 가해진 운명이 그처럼 가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의에 의해서가 아닌, 국가적인 음모의 희생물이 되어야 했던 李여사의 국제결혼으로 인한 험난한 인생은 처음부터 예정돼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였을까, 李여사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운명인 바에는 오히려 그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나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임을 깨닫고 영친왕과 함께 환국한다. 하지만 영친왕은 이때 벌써 돌이킬 수 없는 환자의 몸이었다.

李여사는 귀국 후 정부보조금을 받아 생활하면서도 무언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이때부터 영친왕과의 오랜 꿈이기도 했던 사회복지사업을 실현시키기 위해 자금마련을 위해 칠보(七寶)를 상품으로 제작하는 일에 착수판매를 시작한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65년 1월 「장애자들의 자립능력을 이끌어주고 사회생활을 영위하도록 선도」할 목적으로 자행회(恣行會)를 설립, 마침내 복지사업의 첫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이해 자금마련을 위해 도일(渡日), YMCA, 동경한국문화원 구호텔뉴저팬 등에서 바자회를 개최하는 한편 한국에서는 부산·광주·대구·제주 등지로 옮겨가며 왕조(王朝)의 의상 발표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이듬해 순종황후(純宗皇房)인 윤대비(尹大妃)가 별세한 뒤 칠궁사당(七官祠堂)으로 있는 창고를 이용해 15명의 농아와 소아마비 학생들로 기술교육을 처음으로 시작, 목각·미싱·현물 등을 가르쳐 재활의 기틀을 마련해 주게 된다. 1967년 10월 20일, 영친왕의 탄생일을 기념하여 명휘원(明暉員)이란 명칭으로 정식, 재활기술교육원을 개원함으로써 착착 숙원사업을 이루어간다. 윤대비의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 1968년 가을 낙선재(樂善祭)로 이사,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으나 그로부터 2년 후 영친왕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마침내 영면한다. 그렇지만 李여사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이해 6월 서울 인사동에 명혜(明惠)회관을 건축했고, 다음해인 1971년에는 영친왕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재단법인 영친왕기념사업회를 설립한다. 이어 수원시내에 건물을 빌려 자혜학교를 개관하는가하면 명휘학원 신축공사를 시작했으며 72년에는 자혜학교 교사를 신축한다. 여기에 필요한 자금의 대부분은 李여사의 개인적인 노력뿐만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주변 사람들의 지원으로 충당했다.


1974년 6월에는 하와이를 시작으로 오클랜드·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의상발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복지사업에 대한 공로로 1977년 대구사회사업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밖에도 李여사의 헌신적인 사회복지 사업에 대한 노력은 1981년 국민훈장 모란장(牡丹章)과 1983년 국민훈장 문화장(文化章) 수여 그리고 외국어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등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李여사의 자취에 대한 개략적인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제국 황실이 왕녀 또는 대한제국의 왕세자비로서의 삶을 떠나 신체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어두운 사회에 심신을 투척함으로써 일본이 저지른 죄를 갚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李여사 자신이 짊어져야 할 업(業)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의 왕녀로서 대한제국의 왕세자비가 되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갇혀 힘든 길을 자청한 일이야말로 진정 따뜻한 삶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랴. 李여사가 복지사업으로 분망한 가운데서도 시간을 쪼개어 연마한 글씨와 그림은 청정한 그 자신의 삶을 거짓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새삼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예술에서 기교적인 완성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거기에 머물어서는 진정한 예술적 가치에 이를 수 없음은 또한 당연한 일이다. 李여사는 스스로의 작업을 예술로써 여겨본 적이 없으리란 생각이다. 인품으로 보아 능히 그러했으리라.


李여사는 글씨와 그림에서 기교를 구하지 않았다. 마음 깊숙이 에서 녹아 흐르는 진실하면서도 간절한 무엇을 휜 종이 위에 받아내고 싶었을 따름이기에 단지 손에 익은대로 옮겨놓았을 것이다. 그래서 李여사의 글씨와 그림은 각별한 인연이 없는 사람들 마음에도 순수하고 따뜻한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리라.

아름다운 삶과 그 삶을 이끄는 정신적인 힘이 지어내는 문자언어와 조형언어의 진실하고 소박하며 담백한 맛을 음미하는 일은 우리들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李여사의 그림은 투명하다. 그래서 시간적으로 걸리는 것이 없다. 너무도 선명히 투시되는 의식의 그림자로써 던져지는 형태미에 우아하고 고상한 삶으로 가꾸어진 인격미가 겹쳐지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申 恒 變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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