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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이마동

페이지 정보

작성자옛날물건 댓글 0건 조회 109회 작성일 18-04-19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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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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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년도 : 1906 

출생지 : 충남 아산 


李馬銅의 人間과 作品世界


-그의 유작전에 즈음하여


李 慶 成 國立現代美術館長



지금으로부터 5년전 1981년 시카고에 들렸을 때 나는 이미 미국으로 건너 온 청구 이마동을 뵈오려고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몹 시 나빠서 만날 수 없다는 가족의 얘기를 듣고서 다 시는 만날 수 없다는 그에 대한 정이 복받쳐 간청하 다싶이 청구를 뵈온 적이 있었다.


이미 당뇨와 고혈압으로 인해 시력이 극도로 약화되고 보행도 불가능한 형편이었으나 청구는 반가웁게 맞아 주었고, 가족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청구와 오랜동안의 얘기를 주고 받았다.이것이 청구와의 최후의 만남이었다. 평생 사랑하는 조국에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후진을 키워온 노화가에게는 외로운 생애의 마지막 부분이었고 모든인간이 치루어야할 부채이지만 무엇인지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지는 것은 그가 낯선 미국 땅에서 생의종말을 맞이한다는 것 뿐만은 아니었다.


화가 이마동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번 그의 작가론을 쓴 바 있고 더구나 홍익대학 학장시절에는 매일같이 그를 모시고 생활하였기에 이 글을 쓰는 데 있어너무 많은 회상과 자료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를정도로 풍부하다.

더욱 여러번에 걸친 그의 작가론 집필로 말미암아그의 본질규명과 생의 탐색도 정형화시킨 바 있다.

따라서 새로운 사실을 쓰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발표한 구고를 정리하면서 유작전에 즈음하는 그의 글로 삼을까 한다.



청구 이마동은 1906년 5월 1일 충남 아산군 영인면아산리에서 이석민의 외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또 잘 그려서 그의 두각은 휘문고보시절에 본격적인 것이 되었다. 휘문고보에서는 춘곡 고희동과 무호 이한복의 지도를 받아그림의 기초를 닦았고 그것도 모자라 당시 프랑스에서 돌아와 새로운 미술을 몸에 지닌 이종우를 찾아중앙고보에 설치된 한국 최초의 아트리에에 문하생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1923년에 설치된 고려미술원에 당시 경신고보에다니었던 구본웅 등과 이곳에 입학하여 회화에의 길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이 무렵 동경미술학과출신의 山田新一라는 일본인이 서울에다 조선미술원을설립하여 신미술의 교육에 종사하였는데 청구는 연구에 열이 타서 이곳도 다니었다. 이곳에서는 홍우백(洪祐伯), 구본웅(具本雄), 백남순(白南舞)등이 동창이었다.

그래서 그는 1927년 청운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그곳에서藤島武二등 좋은 교수의 지도를 받아 그의 화가로서의 기초를 굳건히 하였다. 이 같은 노력과 정진의 보람은 미술학과 재학시 선전(解展)의 7회, 8회전(1928,29년)에 특선을 하였고 1934년인 제13회전에도 입선을 하였다. 이 때의 작품들은 대부분 시점을 크게 잡아 형체를 다이나믹하게 다루고 텃치도 힘차게 움직여 화면에 큰 움직임을 주고 있다. 그것은 선생의 시각의 탓도 있지만 그가 지도 받은 교수의 영향도 있었다고 본다.


당시 동경 미술학교 교수진은 프랑스에서 인상파의그 아류의 영향 받은 미술가들에 의해 구성되었고 그중에는 일본적인 풍토성으로 자기의 작품을 순화시킨 사람도 있다. 그러한 사람중의 한사람이 藤島武二이다. 이들 선생의 지도를 받은 청구는 자연 인상파적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또 인상적으로 자연을 해석해서 시각의 기쁨을 바탕으로 하는 자연긍정의 테두리에서 자기의 시각을 정착시키고 있다.

이같은 예를 1934년 제13호 선전입선작 <꽃이 있는정물>을 들어보면 명확해진다. 이 그림은 대각선으로 물체를 배치하여 우선 화면에 운동감을 만들고 거기에다 원경의 석고상과 중경의 탁자 위의 흰 테이블크로스와 화분 그리고 전경의 꽃분을 명색(明色)으로처리함으로써 색의 유기적인 관계를 설정하고 명확한 뎃상 위에 날카롭게 움직이는 붓의 움직임은 지적이고 명쾌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이 무렵이 청구로서는 가장 왕성한 스테미나로 창작에 임한시절이라고 생각된다.


1932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국에 돌아와 33년에 동아일보의 미술 기자가 되었다. 그리하여틈틈히 그린 그림을 모아서 1938년 화신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그 후 1939년부터 1961년까지 오랜동안 이 나라의미술교육을 위하여 몸을 바치어 주로 보성중고교에서 미술교사로 있었고 교감을 지냈다.

1950년 한국동란 때에는 국방부종군화가 단장으로전열에 끼어 적극참여했고 1951년 부산시절에는 대한미술협회 부회장으로 화단 행정에 참가했다.

1953년 부산국제구락부화랑에서 제 2회 개인전을개최하고 1953년 환도직후에는 제 2회 국전심사위원으로 피임되어 그 후 역대 국전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57년에 대한미술협회의 위원장이 되고동년 중앙공보관에서 제 3회 개인전을 개최하였다.그 후 1962년에 제 4회 개인전을 국립도서관화랑에서 개최하여 작가로서의 끊임없는 정진을 보여주었다.

1962년에는 서울특별시 문화위원이 되고 1963년에는 홍대 교수로 재직하였고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으며, 1963년에 홍익대학장이 되어 이나라 미술교육의최고봉에서 그의 인간적인 역량을 기울였다.

1971년 7월 홍익대학교를 정년퇴직한 후 몇 년 동안 작가생활을 하였고 자제들이 이민간 미국으로 건너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75세를 일기로 1981년 9월 시카고에서 세상을 등지고 말았던 것이다.



청구 이마동의 작품세계를 개관하면 1960년대를중심하여 전후로 구별할 수가 있다. 전기 역시 1930년대까지의 수련기와 그의 원숙한 경지로 나눌 수 있고, 1960년 이후도 둘로 나누어 화면을 정서적으로다루고 점묘를 시도한 시기와 화려한 색채의 대립 속에 화면에 긴장을 주는 최근의 경향으로 나눌 수가 있다. 그 어느 시기의 것이 가장 청구적이냐는 것은 속단할 수 없어도 그때그때 인생과 더불어 익어가는예술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꽃이 있는 정물>(1934)과 <남자상>(1931)이 전기의 청구의 예술적 의지를 잘 보이는 의지적인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화면의 바닥에 깔려있는 강인한 구조의식의 바위같이깔린 형태에의 집착은 그가 감정을 위주로하는 색채화가가 아니라 형태화가라는 것을 엿보이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그가 시도하고 있는 색감에의 탐익도 노경에 무르익는 청구예술의 일표정이라고 믿어진다. 따라서 청구작품은 초년의 형태에서 만년의색채로 올바른 변모를 보인다.


최근작에서 발현된 색채에의 집착이 그의 회춘을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도 미의 순례자로서의올바른 방향진행이 아닌가 생각된다.

무르익는 것은 풍만한 맛을 뜻하고 시각적인 면에서 화려한 색채의 향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조로증에 걸린 한국의 화가중에서 비교적 정신의 젊음을보유하고 자기예술을 추진하고 있는 청구체질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풍부한 그의 낭만정신의 탓이다. 그 낭만이 시들지 않는 한 청구예술은 시들지않는다.



이상, 나는 청구의 인간과 작품세계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그러나 인간 이마동은 어디까지나 나라는 입장에서 본 그의 모습이기에 혹시 다른사람이 본다면 내가 모르는 또다른 세계 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이미 타계한 청구를 생각하며나 역시 노경에 접어들어 얼마 있으면 저 세상에서청구와 만날 것을 생각하며 잠시 감상적인 회고에 잠긴다.


그 회고란 정확한 연대는 기억에 없으나 1970년대후반 청구를 모시고 대만과 일본에 여행한 적이 있었다.

이 여행은 한·중예술연합회 대만교류전을 위해서그곳에 초청을 받아 갔던 일이다.

가는 도중 비행기가 기압 때문에 몹시 동요를 하였는데 그때 청구는 겁이나서 내 손을 꼭 잡고 겁에 질렸었다. 노년에 접어든 청구가 어린애처럼 겁이 난다는 것은 그의 기질이 선천적으로 약하고 온순하다는 것도 된다.


청구는 충청도 태생이다. 그것도 충청남도이다.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철두철미 충청도 양반이다. 평생 화내는 적이 없고 큰 소리 한번 치는 일이 없는 온화한 신사였다. 그 온화한 신사도 단 한번나에게 화를 내고 큰 소리를 친적이 있었다. 그것은그가 홍대 학장시절 열린 국전 비평을 신문지상에「고장난 국전」이라는 표현으로 신랄하게 평한적이있었는데 그 글을 보고 청구는 나에게 쫓아와서 혼을낸것이다.

왜냐하면 국전은 청구같은 노대가에게는 둘도 없는 안식처이고 유일한 발표의 광장이었기 때문이다.더구나 그 해의 국전은 청구가 심사 위원장을 맡은해였다. 그는 운동장에서 만난 나에게 다짜고짜 남의 잔치에 재를 뿌리지 말라고 하였다. 그것이 근 20년에 가까운 나와의 교분에서 단 한 번 성난 얼굴이었다.


대만과 일본 여행은 몹시 즐거웠다. 피차 처음 보는 대만인지라 이국적인 풍물도 흥미로웠지만 풍부한 인심과 맛있는 중국요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청구에게는 그 맛있는 중국요리도 주의해야할 금기였다. 왜냐하면 집을 떠날 때 청구 부인께서 너무 기름진 음식은 먹지 말라는 당부도 있었고 또 사실 혈압이 높고 당뇨에 시달리고 있던 까닭에 과식과 더불어 기름진 중국요리는 이롭지 못했던것이다.

특히 청구와 더불어 오사까예술대학장의 우대를받으며 나라와 교토의 고적을 탐방한 것은 평생 잊을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와 같은 인간성이 풍부하고 인정이 많고 또한 예술가로서도 자기의 경지를 지니고 있는 청구 이마동이 타지에서 홀로 세상을 등진 것은 사람의 죽음이란 언제, 누구에게나 한번씩은 닥아 올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청구와의 유별난 교분을 생각할 때 감상에 젖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가 청구는 갔어도 그가 남긴 작품은 지금 내가마지막 인생에 봉사를 하고 있는 과천에 신설된 국립현대미술관 제 4 진열실에 상설되어 있고 또한 국내여러 미술관에 상설되어서 그의 존재를 우리나라 미술과 더불어 빛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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