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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손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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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옛날물건 댓글 0건 조회 248회 작성일 18-04-19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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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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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년도 : 1921 

출생지 : 경북 


정신적인 것과 고요함의 세계


황 지 우(詩人) 1987. 봄.


화가 孫東鎭은 지금 파리에서 살고있고, 거기서그곳의 화가로서 활약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在佛화가이고, 파리의 예술적 세계성에 의해 능히"세계적"이라 일컬을 수 있는 한국인 작가이다. 사실그가 프랑스에서 이룩한 畵業의 위력은 자랑할 만하다.


1979년 8월, 그는 프랑스 명예 예술가 회원이되어있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다른 화가 14명과함께 파리 교외 에브리에 있는 1천호짜리 그림을 걸 수있는 화실이 있는 40여평의 아파트를 제공받았으며,그가 오랫동안 열망했던 것처럼 오직 화법에만 골몰할수 있도록 일체의 비위생적인 삶으로부터 격리된행복한 공간을 누리고 있다. 그 행복한 공간은 파리의예술星座에 그가 하나의 별로서 차지하고 있는 일정한위치를 확인시켜 주는 한 점이기도 하다. 그것은순전히 캔버스에 처해진 그의 종신형, 그 영혼을목마르게 하는 苦行을 둘러싼 그의 영광이면서 동시에우리도 그 背景 속에 있게 하는 가시돋힌 영광이다.왜냐하면 그 "손동진(Sohn Dong Chin)" 이라는 이름뒤에는 언제나 "코레앙"이라는 국제적 인식표가뒤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손동진은 파리에 있는 우리화가이다. 예술에 대해 인색한 것으로 알려진 "LeFigaro"지는 1980년 3월14일자에 손동진의 <誕>을크게 실으면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한국인 화가 손동진의 그림들은 기하학적이고 상징적인 모티브에 의해 구성된, 다채로운 광채를 면 직물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각 부분들 하나 하나가조화를 이루며 변천해 가는 모습은, 자주색과 붉은 색의 물고기들이 청색, 녹색 아라베스크 무늬에 녹아있는 양식의 통일성을 창조하고 있다. 기이하게 생긴 이방의 새들은 장식적 곡선의 리듬에 의해 들어 올려진 탈춤꾼(danseurs masques)을 따라가고 있다. "


여기서 아라베스크 무늬란 조선조 民畵에 그려진 물결 문양의 내림일 터인데, 그래도 그 양식적 통일성속에 음악적 율동을 부여하고 있는 비밀이 탈춤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음은 곧 손동진 회화의 前歷이그들에게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파리 미술대학 "에콜 쉬페리에 데 보자르"를 나온 이 한국인 파리지엥은 그들에게 그만큼 친숙한 이방 사람이다. 그는 그들에게 결핍된 것, 말하자면,Figaro지의 타이틀대로 "정신적인 것과 고요함"에 대한 그들의 시각적 굶주림을 채워줌으로써 그의 작품이 지금 그들에게 먹혀 들어가고 있는, 살아있는 예술가로는 보기 드물게 다복한 유럽 예술의 현역인셈인데, 비록 그의 회화적 함의를 운반하는 기호가그들의 눈에 먹혀들 수 있도록 체계화되어 있다할지라도, 손동진의 회화는 순전히 유럽적인 것도순전히 한국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가령 윤이상의음악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의보편적인 의미에서 세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점에 있어서는 샤갈이나 미로도 그랬었다.진정한 개성만이 세계성을 획득한다. 1983년 파리의제7회 "조형 예술전"에서 大賞이 손동진의 作品에수여된 것도 그의 그러한 개성에 대한 축복이었을것이다. 그 개성으로 인하여 손동진의 이름은 장 기통,삼식, 자크니꼬, 르기니오 등과 같은 파리의 현역작가들과 나란히 있다.


古都 慶州, 회화적 숨결의 동력


손동진 회화의 숨결의 근원은 新羅 古都의慶州이다. 그곳에서 그는 고대 신라 6촌 중의 한 村長인孫純을 조상으로 하는, 대대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한이른바 "귀한 피"가 흐르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손동진회화에 일관되게 흐르는 엄격한 아카데미즘의 격도바로 그러한 피의 흔적 이라 할 수 있다. 그의옛집에서는 자주 광대놀이 따위가 벌어지곤 했었다.

넓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충무 오광대 놀이라도벌어지면 인근 동네 사람들이 몰려왔고, 어린 손동진은마루에 앉아 턱을 괴고 그 기이하고 흥겨운 가면무를물릴줄 모르고 바라보았다. 어린마음에 무서움증이들게 흉칙하기도 하고 그런가하면 어딘가우스광스럽기도 한 그 假面은 손동진의 시각적 기억의원판에 너무나 선연하게 각인되었다. 그 가면은 어린그에게는 세계에 대한 최초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세계의 표정이었다면, 훗날 화가 손동진에게는외면하고 싶은 현실의 고통에 대한 심리적 방어 기재의회화적 마스크로 다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가지 매우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집안이 天道敎를 家宗으로 하고있었다는 점이었다. 조선조 후기 경주지역에는최제우의 동학 세력이 크게 자리잡았을 뿐만 아니라3. 1운동과정에서 천도교의 비중이 컸던 점을 염두에두면, 손동진이 태어나던 해의 그의 가계에 배어든민족주의적 根氣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외조부白農은 上海, 만주, 하와이를 근거로 해외 독립운동에종사했으며, 외교노선이나 무장투쟁노선과 같은직접적 투쟁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손씨 가계는 다른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었던 것 같다.


미술에의 立志에서 밀항하기까지 그가 무엇인가를 그려보고 싶다는 예술의욕을 최초로 느꼈던 것은 어린시절 자주 오르던 半月域 구릉에서 달빛에 드리운 자신의 그림자 유희로부터였다.

어린시절 그는 달밤을 아주 좋아했다.그의 고향, 이 천년 古都의 상공에 연등처럼 떠있는만월은 그를 반월성의 고고학적 시간성 속으로끌고갔을 것이다. 그는 괜히 신이나서 아무도 없는데서 춤을 추었다. 물에 잠긴듯 희푸른 일색으로 물든풍경 속에서 그림자만은 짙은 감색으로 약동하는것이었는데 그것이 그에게 이상한 생명감을 주었으며,이를 표현해보고 싶은 충동을 건드렸다. 대낮에 드러난현실이 아니라 달빛에 착색된 과거가, 그리고 "지금,이곳"이 아닌 천년 세월의 고대에 반영된 자신의그림자 춤이 그의 예술 충동을 자극했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천신만고 끝에 일본에 밀선으로 잠입한 그는동경국립예술대학 미술학부에 들어갔다. 목숨을 걸고그가 제발로 걸어 들어온 예술은 이제 그에게는求道였다. 당시 일본 회화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야스이(安井)와 우메하라(梅原)가운데 그는 야스이교실로 들어갔다. 후자가 르느와르류의색채주의자인데 비해 전자는 뎃상을 중시하는 엄격한불란서 전통의 선묘주의자였다. 3년후동경예술대학에는 건축과에 김수근, 성악과에이인영이 와 있어 그들과도 친해졌다. 야스이 사사 4년,그는 이제 뎃상이라면 어떠한 오브제이든 그 결을 물흐르듯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1952년 동경예술대학 미술 콩쿠르에서 그는 大賞을받았다. 동 대학원 1년을 마치고 1954년 9月 그는파리로 향해야 했다. 그 파리는 그의 일본 스승들도그곳을 바라보고 있어서 그에게는 그들의 등에 가려개기일식 이 되어버린 캄캄한 예술의 光原이었기때문이었다.


한국적 감성과 추상 충동


1959년 서울의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손동진 귀국작품전"이 열렸다. 오로지 미술수업을 위하여 붓한자루로 현해탄과 대서양을 노저어갔던 손동진은 그의파리의 성공작들을 만재하고 일시 귀국한 것이다. 그의귀국전은 해방이후 처음 있는 대성황이라고 그때의신문들은 말하고 있다. 파리의 「에콜 나쇼날 쉬페리에데 보자르(파리 미술대학)」를 다닌 최초의한국인이라는 점에서 국내 화단의 관심은 온통 그에게집중되었는데, 그관심에는 한편에 부러움과 다른한편엔 "어디 한번 보자"는 경쟁적인 호기심이 조금씩섞여 있었던 것 같다 《시실리의 回想》《오달리스끄》《인공낙원》과 같은 손동진의 작품은 서구적 고전과동양적 감성의 탁월한 조화를 성취했으며 특히구상에서 비구상에 이르는 과정을 필연적 연관성을가지고 보여주고 있다고 평한 사람도 있었고, 손씨의詩情어린 동양적 여운은 스스로 만든 기계문명에피로해진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동경에 상응하며그가 다른 작가의 직접적 영향을 기탄없이 보여주고있는것은 그의 화가적 성실성에서 기인한다는 좀심드렁한 평을 단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손동진은,앙포르멜의 유치한 모방에 급급했던 50년대 우리화단의 맹목적인 서구 추수주의 경향에 비하면 향후우리 한국 현대 회화가 나아갈 보다 주체적인 방향을향하며 훨씬 앞질러 나가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여지가 없다. 적어도 그는 현대추상회화의 최고덕목으로 떠받들어지던 그 몽매한 "모데르니테"(modernite)를 "멀리 서양에서 찾을 것도 없이우리의 武烈王陵의 石龜像에서도 그 승화된 표현을찾을 수 있다"고 말한, 그 당시에는 몇 안되는,선취적인 예술 이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1959년 파리 국립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그후귀국하기까지 손동진은 파리, 칸느, 도빌의 국제미술전출품, 그르노블개인전, 스텔로, 잘라마다, 파사와의4인전등 눈부신 화력을 보인다.

더불어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그것의 양식적 변천을파악하는데 있어서 유념해야 할 또 한가지 사실은,그가 1957년에서 59년까지 루브르궁 미술연구실에서프레스코를 연구했다는 점이다.

59년 서을 중앙공보관에서의 귀국전, 62년 그의서울대 미대 재직시 신세계미술관에서의 개인전에서선보인 그의 일련의 작품들 (<女言>, <閏月>, <草堂>,<古諺>등)에서 확인될 수 있다.

1960년부터 77년까지 서울대 미대, 세종대 교수로있으면서 1776년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기까지, 그는유영국, 이준, 이대원 등과 "新象會"동인 활동(1962∼64)을 하기도 했고 거의 매년 국내 개인전 및국제미술전 출품을 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보인다.

그러므로 손동진의 회화사는 외견상, 50년대파리시절을 제1기로, 6, 70년대 서울 시절을 제2기로,그리고 오늘날의 그의 두번째 파리 시절을 제3기로하면서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작품의 양식적 변천을 기준 삼으면 손동진의회화세계는 크게 보아 두 단계로 나뉘어지는 것으로내게는 보인다. 하나는 1957∼9년에 그려진 <탈춤>연작을 기점으로 하여 1970년 신세계미술관에서의 탈춤을 주제로 한 개인전을 거쳐 1976년의 <騎馬像>,<半月城>을 정점으로 하는 그의 한국적인 것에의아케이즘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재차 도불 이후 주로80년대에 그려진 <誕>, <尙>, <吾>에서 볼 수 있는정상적인 것의 문양에 대한 명징한 구성주의가그것이다.


<탈춤>연작, 선취적 개성


50년대 우리 화단의 앙포르멜 홍수시대에 나온손동진의 탈춤연작(1957∼9)은 한편으로는 그러한 유럽 文化植民主義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으며,다른 한편으로는 60년대 韓日國交 정상화 이후 일본세력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촉발된 문화적자기방어로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번졌던 탈춤운동에 先行하고 있다. 이점은 동경과 파리에서 세계미술의 山頂들을 넘나들고 온 그의 경력에 비추어 매우예외적이며, 따라서 이것은 우리 화단에서 차지하는그의 개성적 위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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