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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 문화산책-고려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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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옛날물건 댓글 0건 조회 203회 작성일 18-04-18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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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 

한국의 도자기는 고려 건국 초인 10세기에 비로소 자리가 잡혔다. 토기가 주류를 이루던 삼국시대나 통일신라로 이어져오는 가운데서도 7세기경부터 연유계 시유도기(鉛釉系施釉陶器), 회유계 경질시유도기(灰釉系硬質施釉陶器)의 오랜 전통이 있었다. 

이러한 바탕이 고려자기가 발달하는 터전이 되었다. 국내의 자체적인 노력과 발전도 있었지만, 중국 도자기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4세기경의 청자의 조형(祖形)이라고 일컬어지는 고월자(古越瓷), 당나라 말기의 정요(定窯)에서 제작된 백자, 저장성[浙江省] 북쪽에 있는 웨저우요[越州窯]에서 만든 오대(五代) 때의 세련된 청자, 베이징 부근의 정요백자(定窯白瓷)와 양쯔강[揚子江] 하구 남쪽의 웨저우요 청자들이 한국으로 전래되었을 것이다.

고려자기라면 흔히 청자를 연상하게 된다. 그것이 고려시대 귀족들의 기호에 맞아,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백자는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그 수효가 적어서 현존하는 것은 많지 않다.


1) 10세기

청자와 백자가 탄생되는 시기지만, 역시 토기가 더 널리 쓰였다. 이 토기의 형태가 청자의 형태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청자와 토기제작이 병행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청자는 993년(성종 12)에 만든 순화사년명(淳化四年銘) 항아리가 지금까지 전한다. 이 항아리는 고려 태조의 태묘(太廟)에서 제향(祭享) 때 쓰던 그릇이다. 이 항아리의 유약(釉藥)은 담록조(淡綠調)의 황회색계(黃灰色系)여서 청자로 보았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이것은 백자로 보아야 옳다는 주장이 있다. 즉, 태토(胎土)가 회백색의 자질(瓷質)에 가까워서 불완전 백자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의 제작은 당 말의 정요백자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측한다.

이 무렵 청자의 발달을 추측케 하는 자료가 있다. 11세기 초 거란(契丹)의 성종(聖宗) 영경릉(永慶陵)에서 발견된 고려청자음각문편(高麗靑瓷陰刻文片)이 바로 그것이다. 11세기 초 외국 왕실에 선물로 청자를 보냈다는 사실은 이미 청자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져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아직 청자가 일반화되지는 않았으며 재래식 토기나 도기가 점차 자질(瓷質)로 바뀌어가는 시대였다. 따라서 초기 수준의 청자류가 제작되는 가운데 반자질(半瓷質)로 된 백자기술도 개발도상에 있었음은 순화사년명 항아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2) 11세기

이 시대에 송나라의 도자기는 그 정교·치밀함과 의장(意匠)의 세련됨이 가장 높은 수준에 달해 있었다. 이 무렵 거의 40년간 왕위에 있었던 문종(文宗)은 현명한 왕으로 송나라의 문물과 직접적이고 폭넓게 접촉하여, 고려문화 진작(振作)의 새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고려자기의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당시에 제작된 자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에 제작되어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양각(陽刻)·음각(陰刻), 또는 무늬가 없는 소문(素文)의 순청자(純靑瓷)·퇴화문청자(堆花文靑瓷)·회청자(繪靑瓷)·철회백자(鐵繪白瓷) 등이 있다. 소문 순청자는 그릇 표면이나 안에 장식 없이 청자유약만 발라서 구운 것이다. 그것이 너무 단조롭고 변화가 없다고 생각한 때문인지, 당초문·인동문 등을 선으로 파서 장식한 것이 음각 순청자이며, 더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하여 문양을 도도록하게 부각(浮刻)한 것이 양각 순청자이다.

퇴화문은 청자 태토 위에 백토니(白土泥)로 도톰한 점을 찍어 장식하고, 그 위에 유약을 발라 구우면 흰 점이 튀어나와 보인다. 회청자는 청자 태토 위에 백토니나 자토니(爪土泥)로 화초나 동물들을 대범한 필치로 그려서 유약을 발라 구우면, 백토는 흰색, 자토는 검은색 그림으로 나타난다. 백자철회문 그릇은 석고와 같은 백색의 질감을 나타내는 연질계(軟質系) 고려백자 태토 위에 철사(鐵砂)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푸른 기가 도는 백자유약을 입혀서 구운 것이다. 철사로 그린 철회 위에는 유약이 탈락되는 것을 볼 수 있다.


3) 12세기

12세기의 고려자기 전기는 순청자시대였고, 후기부터 상감청자시대에 들어간다. 1123년(인종 1)에 송나라의 국신사(國信使)를 수행해온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당시의 청자를 묘사한 글이 나온다. 

"도준(陶尊), 도기의 푸른 빛깔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며, 근년의 만듦새는 솜씨가 좋고 빛깔도 더욱 좋아졌다. 술그릇의 형상은 오리 같으며, 위에 작은 뚜껑이 있는 것이 연꽃에 엎드린 오리의 형태를 하고 있다" "도로(陶爐), 즉 사자 모양을 한 향로 역시 비색이며, 위에 쭈그리고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에는 앙련화(仰蓮花:위로 향한 연꽃)가 있어서 그것을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이 물건이 가장 정절(精絶)하고, 그 나머지는 월주(越州)의 고비색(古秘色)이나 여주(汝州)의 청자와 유사하다". 

인종의 능에서 발견된 청자류는 상감이 없는 순청자류였다. 전기에 만들어진 것은 양각이나 음각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소문 순청자였고, 《고려도경》에 언급된 것과 같은 어떤 물상의 형을 취한 것들이다. 그리고 퇴화문·회청자·청자진사채퇴화문(靑瓷辰砂彩堆花文)·철채백퇴문(鐵彩白堆文)·청자철채(靑瓷鐵彩) 등이었다. 어떤 물건의 형상을 취한 도범(陶范)으로 만든 것으로는 동철기(銅鐵器)의 모양을 그대로 딴 것, 인간과 새·동물의 모양을 본뜬 것, 표주박·참외·석류·죽순 등 화초의 형태를 취한 것 등이 다양하고, 또 투각(透刻)의 기법으로 장식한 것도 있다. 철채백퇴문은 그릇 전체에 철채를 입히고 백토로 퇴화문 점을 찍은 위에 얇게 청자유를 시유(施釉)한 것으로, 흑유(黑釉)나 천목(天目)과 같은 질감을 나타낸다. 

인종 때는 고려청자가 장족의 발전을 하였으며, 이 12세기 전반기가 순청자의 전성시대였다. 이런 청자를 만든 곳은 전남 강진요(康津窯)와 부안요(扶安窯)였다. 신안(新安) 앞바다에서 원나라 청자를 실은 배가 발견되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황해의 대안(對岸)에 있던 웨저우요와의 내왕이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발달된 송나라 청자의 직접적인 영향을 거기에서 받아, 고려의 독자적인 청자를 만들어내는 자극제로 삼았을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순청자들은 태토가 고르고 얇으며, 만듦새가 단정할 뿐만 아니라 유약이 티없이 아름답다. 비취와 같은 옥색을 나타내고 있는 이들 청자유의 광택은 고요하며, 식은테[釉裂:氷裂]가 나타나지 않는 그 시대 청자유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요란한 장식무늬가 없는 소문의 것이 많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은 전적으로 유약의 아름다움에 집약시키듯, 어느 때의 유약보다 아름답고 안정되어 있다.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의 개발은 12세기 중엽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123년의 고려청자를 이야기한 《고려도경》에 상감기법에 대한 언급은 없다. 46년에 죽은 인종의 장릉(長陵)에서 순청자 그릇은 나왔어도, 청자상감은 한 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연대가 분명하게 밝혀진 상감기법으로 만든 청자는 1159년에 죽은 문유(文裕)의 무덤에서 나왔다. 여기에서 나온 청자 대접에는 유려한 보상당초(寶相唐草)무늬로 된 흑백상감이 원숙하게 다루어졌다. 따라서 이때 이미 상감기법이 상당히 발달한 셈인데, 인종이 죽은 뒤 13년 만에 이렇게 발전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고, 아마 인종 때도 벌써 상감기법을 쓰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인종 때 훌륭한 청자상감이 많이 나오지 못하여 장릉에 부장품으로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로부터 13년간에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 같다. 상감기법은 태토 표면에 그리고 싶은 문양을 음각으로 파고, 거기에 백토니(白土泥) 또는 자토니(爪土泥)를 붓으로 발라서 메운다. 그것이 마른 다음에 그릇 면에 넘쳐 묻은 이토(泥土)를 깎아내거나 닦아내면, 음각한 곳을 메운 것만 분명하게 남는다. 거기에 청자유약을 입혀 구워내면, 백토는 흰색으로, 자토는 검은색으로 나타나 유약을 통해 비쳐보인다. 

이 상감문양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해 유약의 투명도가 더 높아지고, 유약은 차차 얇게 입혀지게 된다. 1157년(의종 11)에는 청자기와[靑瓷瓦]도 만들었다. 명종 지릉(明宗 智陵:1197)에서 출토된 일군의 청자상감들은 정교하고도 세밀한 최상질의 상감이었다. 이러한 상감기법을 도입한 고려청자에는 금이나 은을 상감한 동기(銅器)의 입사기법(入絲技法)을 응용한 것 같고, 또 나전철기(螺鈿漆器)에서 옻칠 속에 자개를 상감한 기법을 따른 것으로도 보인다. 이 2가지는 모두 같은 시대에 우수한 제품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 문양도 이 2가지와 유사한 것이 많다. 

특히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 등은 상감청자의 그것과 그릇의 형태나 문양이 흡사하다. 청자의 상감기법은 이 무렵에 매우 번창하였지만, 한편으로 회청자(繪靑瓷)·진사채(辰砂彩)·청자철채(靑瓷鐵彩)·철사상감(鐵砂象嵌) 등도 만들어졌다. 백자도 꾸준히 만들어졌으며, 거기에 상감을 한 백자상감도 있었고, 철채백퇴화(鐵彩白堆花)무늬·연리(練理)무늬·철사유(鐵砂釉) 등 다양한 기법의 자기들이 만들어졌다. 진사채 그릇은 태토에 진사로 채색한 위에 청자유를 입혀 구운 것으로 연한 팥죽색이 난다. 

청자철채 그릇은 역시 그릇 표면에 철채를 하고 유약을 입혀 구운 것이다. 백자에 상감한 것은 주로 자토로 흑상감한 것이지만, 때로는 윤곽 부분에 청자 태토를 메꾼 다음 그 위에 청자와 같이 흑백상감을 하기도 한다. 연리문 자기는 태토를 백자의 태토인 백토와 청자토·자토(爪土)를 합쳐 반죽한 것으로, 그릇을 빚으면 3가지 빛깔이 마치 복잡한 나뭇결무늬[木理文]처럼 나타난다. 철사유는 유약에 철분이 많이 들어가게 해서 구운 것이다. 철분의 농도나 불길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지만, 갈색이나 흑갈색이 나타난다.


4) 13세기

12세기 중엽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절정을 이루었던 청자상감은 1231년 몽골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미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감기법의 개발과 발전에 따라 청자질은 변화해왔다. 상감문양이 잘 보이게 하는 효과를 위해 유약의 투명도가 높아지고, 유약의 색감은 회청계(灰靑系)로 담소화(淡素化)되었으며, 유약이 고르고 얇아져서 순청자보다 식은테가 많이 생긴 것이 그것이다. 묵직하고 가라앉은 안정감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다. 중국의 자기도 원의 지배로 침체기에 들어갔듯이, 고려청자도 국운의 쇠퇴에 따라 그 기교적인 정교하고 치밀한 성격을 점차 잃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강화천도(江華遷都)가 끝난 13세기 후반에 더욱 짙어졌다. 상감문양도 덜 익숙한 듯 설고 대범하며 거칠어졌고, 그릇의 곡선도 매끄럽고 우아한 맛을 점차 찾아보기 어렵게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단정함과 우아함보다는 실용성과 안전성이 점차 강조되어가는 변화를 일으켰다. 

13세기 후반에는 청자진사채(靑瓷辰砂彩) 기물이 많이 만들어지고, 화금청자(畵金靑瓷)가 나타났다. 1249년에 죽은 최우(崔瑀)의 묘에서 출토된 청자진사채연화문표형주자(靑瓷辰砂彩蓮華文瓢形注子)는 13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진사채가 뛰어나다. 진사채는 상감을 하지 않고 문양을 음각이나 양각한 것도 부분적으로 채색하거나, 흑백상감한 것도 부분을 강조하기 위하여 채색해서, 청자유를 입혀 구워서 그 아름다운 색감을 나타낸다. 이때부터 14세기의 전반에 이르는 동안에 많이 유행하였기 때문에 그 작품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것은 이미 이전에도 만들어졌으나 이 시기에 제작이 활발하였던 것이다. 

화금청자는 오늘날까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고, 깨어진 조각이나 화금이 거의 마멸된 상태로 조금 있을 뿐이며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에도 기록되어 있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조인규(趙仁規)가 원나라 세조(世祖)에게 화금청자를 바치면서 문답하는 기록이 나온다. 세조가 "금은 그릇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쓰는가"라고 하자, "다만 장식을 한 것뿐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또 "그럼 그 금은 뒤에 다시 쓸 수 있느냐" 라고 묻자 "자기는 깨지기 쉬운 것이라, 금도 따라서 없어지니, 어찌 다시 쓰겠습니까" 라고 대답하니, 세조는 "지금부터는 자기에 금으로 그리지도 말고 바치지도 말라"고 하였다. 이 시기는 1280년에서 1290년 사이이다. 그리고 97년 충렬왕이 황서(黃瑞)를 시켜 원나라 성종에게 역시 화금청자를 바친 기록이 나온다. 이 화금청자는 상감청자의 문양에 따라, 유약 위에 그리고 싶은 문양의 선이나 점을 그려 음각하듯 홈을 파고, 이 오목한 홈에 이금(泥金)을 그려넣어 장식한 것이다. 처음에는 단단하지만 긴 세월을 두고 쓰다 보면, 차차 닳아서 없어져버린다. 

또, 이 시대의 자기로는 상감청자 외에 흑유계자기(黑釉系瓷器)들과 철사유자기류(鐵砂釉瓷器類) 등이 만들어졌다. 철사유류는 청자태토 위에 철유(鐵釉)를 씌워 구운 것이어서 금속질감을 나타낸다. 청자태토에 백토상감을 하고, 상감부분 이외의 태토에는 철유를 모두 꼼꼼히 칠해서 구운 철채백상감자기류(鐵彩白象嵌瓷器類) 등이 만들어졌다.


5) 14세기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말, 즉 고려가 멸망하기까지, 퇴화해가는 고려청자의 질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청자의 태토는 거칠고 두꺼워지며, 상감기법도 발전하지 못하고 섬세한 맛이 없어 전성기의 상감청자를 연상하게 하는 점이 보이지 않는다. 고려청자의 세 가지 특이한 장점은 바로 정제된 그릇 곡선의 빈틈없이 매끄러운 균형, 정교하고 세련된 상감기법, 그윽하고 우아한 비색(翡色)의 유약에 있다. 이 청자의 아름다움을 꽃피웠던 고려가 날로 쇠망의 길을 걸을 때에, 청자의 아름다움도 그 쇠운을 함께 해갔다. 이렇게 정교하지 못한 청자상감 그릇들은 조선시대 분청사기가 등장할 조짐이 되었다.


고려백자 도요지

경기 용인시 이동면(二東面) 서리의 중덕곡 마을 뒷구릉에 있는 가마터.

소재지 : 경기 용인시 이동면(二東面) 서리 

시대 : 고려시대 

지정 : 사적 제3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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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329호(1989년 지정). 1960년대 이후 발견되어 호암미술관이 1984년, 1987년, 1988년 3차에 걸쳐 발굴 조사하였다. 가마는 2개의 큼직한 퇴적층 사이에서 발견되었으며, 길이 83m, 너비 1.2∼1.5m, 바닥 경사 약 11° 이다. 가마 좌측에 약 3m 간격으로 23개 출입문이 있으며, 가마벽은 갑(匣)에 진흙을 섞어 쌓아올린, 현존하는 가장 긴 가마이다. 출토 유물은 5m 퇴적층 조사에서 청자주발 ·백자주발 ·햇무리굽사발 ·대접 ·접시 ·발호(鉢壺) ·잔 ·장고 ·병 등이다. 최하층에서 고식(古式)의 청자주발이, 그 위층에서는 백자주발이 주로 발견되어, 처음에 청자를 제작하다가 차츰 백자를 제작하는 가마터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햇무리굽 백자주발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인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에 이르는 백자가마터로 짐작된다


분청사기

조선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15,16세기에는 백자와 분청사기, 2종류의 도자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분청사기는 미술 사학자인 고유섭선생(1905~1944)이 붙인 이름으로, 회색 또는 회백색의 태토 위에 백토(白土)를 입히고 그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운 회청색의 사기 즉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분청사기는 회색 또는 회흑색의 태토 위에 어떠한 방법으로 백토를 입히고 이 위에 문양을 나타내는 가에 따라 상감, 인화(印花), 조화(彫花), 박지(剝地), 철화(鐵畵), 귀얄, 덤벙문으로 나뉜다. 

분청사기의 제작시기는 고려말 조선초에서부터 16세기 중엽까지로 한정되며 백자가 조선시대 전기간을 통해 만들어진 것과는 다르다. 

고려말, 어지러웠던 나라정세와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전라도 지역에 밀집되었던 청자요지는 파괴되었고 도공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분청사기 요지는 해안 뿐 아니라 내륙지방까지 고루 분포되어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분청사기 가마는 남한에서 약 110개 지역에 걸쳐 220여기에 달하며 발굴 조사된 것으로는 전남 광주 무등사 충효동가마, 충남 공주 계룡산가마, 대전 보문산가마 등이 있다. 

초기의 분청사기에 나타나는 문양은 연꽃, 국화, 당초 등이다. 즉 고려말의 질이 떨어진 상감청자의 양식이 그대로 계승된다. 그래서 초기에 만들어진 상감분청과 말기의 상감청자는 구분하기 힘들다. 분청사기의 발전기는 세종연간에 해당하는 15세기 전엽으로 이시기에 분청사기의 양식이 발전하고 자리를 잡았다. 세종 3년에는 그릇에 만든 사람의 이름을 써넣도록 하였으며 세종 8년부터 14년 사이에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간행을 위해 전국의 가마를 조사하였다. 이 시기는 사회촵문화의 전반적인 발전과 더불어 요업의 발전기반이 갖추어진 중요한 기간이다. 이 때에 상감, 인화기법은 물론 조화, 박지, 귀얄 등의 기법도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그리고 태토와 유약은 정선되어 분청사기 고유의 회청색을 띠게 되었으며 문양 및 구도도 안정되었다. 

세종 연간의 발전과 안정을 바탕으로 하여 15세기 후반에는 분청사기가 더욱 완숙의 경지에 이른다. 특히 인화분청의 경우 조선초부터 관청용으로 많이 사용되는데 하나하나의 문양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겹쳐지면서 그릇의 표면이 백토로 뒤덮이는 세련된 양식을 지니게 된다. 

1467년, 1468년 사이에 왕실과 중앙관청에 백자를 공급하기 위하여 경기도 광주에 사옹원(司饔院)이라는 관청의 분원이 설치된 후, 전남 광주 무등산 충효동가마를 비롯한 전국의 가마에서는 중앙공급용 도자기를 제작할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가마들은 급격히 쇠퇴하였으며 질은 떨어지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충남 공주 계룡산 기슭에서는 매우 독특한 양식의 철화분청(鐵畵粉靑)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전반기 이후 이미 쇠퇴의 길로 접어든 분청사기는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이후에는 완전히 만들어지지 않게 된다. 

고려말 청자에서 출발한 분청사기는 그릇 모양에 있어서도 청자의 맥이 그대로 이어져서 매병이라던지 입이 나팔처럼 벌어지고 목이 길며 몸체가 불룩한 병 등이 계속 만들어졌다. 그러나 대형화되거나 실용성을 강조한 형태가 많아져서, 귀족적인 취향을 반영하여 세련된 곡선미를 나타내는 고려청자의 기형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편병에 소박하면서도 대담한 문양이 장식되어 자유롭고 활달한 조형미를 창출해 내었다. 

고려청자가 특수계층에 의해 사랑받았던 것에 대해 조선시대의 도자기는 사용계층에 따른 질적 차이는 보이지만, 왕실에서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그리하여 관청용의 고급그릇은 물론 일반용의 막그릇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분청사기도요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反浦面) 계룡산 중턱에 있는 도자기 가마터.

소재지 : 충남 공주시 반포면(反浦面) 

시대 : 고려시대∼조선 후기 

규모 : 약 30 ㎡ 

이곳에는 분청자기 조각들이 1,320 ㎡의 넓이까지 산재해 있고 침식된 흙이 내려와 쌓여 있다.

가마터는 약 30 m2로 추측되며, 바탕흙[胎土]은 학봉리(鶴峰里) 뒷산에서 가져다 쓴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회분청(繪粉靑)의 소형자기(小形磁器) 가마터로서 계룡산요가 대표적이다. 이곳은 14세기 말의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상감분청계(象嵌粉靑系) 및 백토분청계(白土粉靑系)의 우수한 자기들을 구워냈던 곳이다. 특히, 계룡산 자기는 일본에 건너가 큰 영향을 끼쳐 미시마테[三島手]라고 호칭되며, 상감분청계는 게이류잔 미시마[鷄龍山三島]라 부르고 있다. 또한, 하케메[刷毛目]는 우리 도자기의 백자분청이고, 호리하케메[彫刷毛目] 또는 호리미시마[彫三島]는 박지분청(剝地粉靑)을 이르는 일본인의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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